<이야기가 있는 산책> 융합의학과 김남국 교수
멀티모달 AI가 발달하면서 데이터를 학습하고 패턴을 재조합해 프롬프트 한 마디로 특정 스타일의 영상과 비디오를 손쉽게 만들 수 있게 됐다. 특히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의 지브리 스타일(섬세한 구름의 움직임, 따뜻한 색감, 특유의 캐릭터 표현 등)은 거의 완벽하게 재현된다. 작가들은 ‘이제 인간이 그림을 그릴 이유가 있을까’라는 혼란에 빠졌다.
혹자는 더 이상 훈련의 중요성이 희미해진 ‘창작의 민주화’ 시대가 열렸다고 말한다. 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를 생명에 대한 모독이라는 입장을 표명했다. 평생 자신만의 스타일로 작품 활동을 해 온 감독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충분히 이해가 된다.
하지만 AI가 만든 지브리 스타일은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고 이를 통해 감동과 위안을 받는다면 예술의 일반재화(commoditization)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 번도 그림을 그려본 적 없는 사람도 AI를 활용하면 자신이 상상한 장면을 전문가 수준으로 손쉽게 생성할 수 있게 되어, 지금까지 소수의 전유물이었던 예술 창작의 문턱이 일반인까지 낮아진 것이다. 이런 창작 도구의 혁명적 발전과 예술성 결여에 대한 우려가 교차하는 지금, 앞으로 인간의 창작 그리고 예술은 어디로 향할 것인가?
예술의 진정성
지난 글에서 다루었듯, 18세기 사진이 발명되고 초상화가들이 직업을 잃어버린 후 근대 예술가들은 새로운 예술 영역을 개척하며 근대 미술의 황금기를 열었다. 마찬가지로 AI가 스타일을 완벽하게 모방할 수 있게 되면서 작가는 자신만의 스타일에 집착할 필요가 없어졌고 ‘무엇이 진정한 예술인가’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됐다. 다양한 관점이 있지만, 이 글에서는 다큐멘터리 사진에 한평생을 바친 거장 세바스티앙 살가도(Sebastiao Salgado, 1944~2025)를 통해 ‘작가의 진정성’을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살가도는 브라질 출신으로 상파울루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1968년 파리 소르본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국제커피기구에서 경제분석가로 일했다. 1970년 업무로 방문한 아프리카에서 가뭄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고 아내의 카메라를 빌려 사진을 찍기 시작했고, 참상을 알리고자 1973년에 전업 다큐멘터리 사진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1993년 전 세계 산업 현장의 모습을 기록한 「Workers(노동자)」를 발표했다. 브라질의 세르라 펠라다 노천 금광에서 맨손으로 흙을 퍼 나르는 광부, 유황 가스를 온몸으로 견디며 광물을 캐는 인도네시아 노동자, 초대형 유조선을 해체하는 방글라데시 작업자… 육체노동의 현장이 필름 위에 생생히 담겨 있다. 특히 노천 금광에서 5만 명의 광부들이 200m 깊이로 파놓은 거대한 구덩이를 오르내리며 원시적인 방식으로 금을 채굴하는 장면은 ‘현대판 단테의 지옥도’와 같이 금광의 거대한 스케일과 개미같은 노동자의 노동을 잘 보여주고 있다(사진1).
아프리카의 기아와 난민 등을 기록한 「Migrations(이주)」는 인종 갈등과 기근, 환경 파괴 등으로 삶의 터전을 잃고 떠도는 이들의 가슴 아픈 이야기를 담고 있다. 1994년 르완다 내전 당시 수백만 난민의 비극적 행렬, 보스니아의 난민 캠프의 모습 등 인류의 반복되는 비극과 그곳에서 싹트는 희망을 기록했다. 절망에 찬 눈빛과 희망을 놓지 않는 표정이 교차하는 사진들은 인간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다(사진2).

이후 그는 2004년부터 8년간 지구 곳곳을 누빈 환경 사진 프로젝트 「Genesis(창세기)」를 발표한다.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원시 자연과 생명을 재발견하는 여정이었다. 남극의 펭귄, 남아메리카의 이과수 폭포, 아프리카 초원의 사자와 나미브 사막의 붉은 모래언덕, 아마존의 원주민까지… 살가도는 현대 문명에 의해 훼손되지 않은 자연의 경이와 그 속에 어우러져 살아가는 생명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사진3).
그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우리 모두가 같은 기원으로부터 나왔다는 것, 생명의 존엄과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사진은 글보다 강력한 언어가 될 수 있다’는 그의 말처럼 살가도의 작품은 동시대의 증언이 됐다. 흥미롭게도 살가도는 사진 작업에 그치지 않고 고국 브라질에서 아내와 함께 200만 그루의 나무를 심어 숲을 되살리는 재삼림화 프로젝트를 이끌었다.
그는 카메라를 들고 분쟁과 빈곤의 현장에 들어가 오랜 시간 머물며 그곳 사람들과 삶을 함께했다. 그는 대상에 대해 시혜의식을 갖지도, 반대로 신화화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대상에 다가갈 수 있는 친화력을 중시했다. 현지인과 같이 버스를 타고 다니며 이동했고, 친해지기 전까지는 카메라를 들지 않았다. 특히 브라질 노천 금광에서는 수만 명의 광부와 동고동락하며 그들의 고된 노동과 꿈을 기록했다. 「창세기」 촬영을 위해 머물던 인도네시아에서 그는 말라리아에 감염돼 합병증으로 고생하다 지난 5월 백혈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인간 창작의 미래는?
“AI가 만들어낸 것은 과정이 생략된 결과물이고, 과정 없는 결과물은 소음에 불과하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작가의 노력이나 진정성이 없는 AI 작품들은 너무 쉽게 생산되고 소비되어 진정한 감동을 주기 어렵다. 하지만 이제 형식적 완성도를 올리기 위한 기존의 도제 시스템에 매몰되지 않고 다른 차원의 예술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바로크의 대가들이 스케치만 그리면 수많은 도제들이 세부적인 그림을 완성해 역사에 남은 수많은 대작을 만든 것처럼, AI는 반복적이고 기술적인 작업을 대신해 주며 예술가가 창의적인 작업에 더 집중하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 웹툰 작가들은 AI를 사용해 배경 작업 시간을 단축하고 그 시간에 캐릭터의 감정 표현에 더 집중한다며 “기술을 활용하되 인간만의 감성은 포기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AI가 인간 창작의 경쟁자가 아니라 보조 도구로 활용될 때 창의성이 더 빛난다’는 「네이처 인간 행동(Nature Human Behavior)」 에 실린 연구도 있다.
살가도의 사진이 지금도 감동을 주는 이유는 살가도 본인이 개척한 시각 언어로 세상에 없는 이미지를 만들었고, 그 과정에서 겪은 깊은 고민과 흘린 땀, 시행착오의 흔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진정성도 AI 시대 인간 창작의 존재 이유 중 하나가 될 것이라 믿는다.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인간의 창작 욕구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기술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고유의 창작 영역을 지키고 독특한 목소리를 잃지 않고 지켜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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