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스’는 원래 심리학 용어가 아니다
살다 보면 생계에 대한 걱정, 부모와 자식에 대한 걱정 같은 온갖 스트레스에 마음이 지칠 때가 있다. 스트레스로 가득 찬 일터가 전쟁터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런데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쓰는 단어인 스트레스의 어원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스트레스는 원래 물체에 가해지는 압력을 뜻하는 물리학 용어였다. 이 용어를 오늘날과 비슷한 의미로 가져온 사람은 내분비를 연구하던 과학자 한스 셀리에다. 1936년, 그는 쥐를 추위에 노출시키거나 쇼크를 주는 등 쥐를 ‘못살게 굴면’ 흉선, 림프절, 비장 등 면역 관련 기관의 크기가 줄고 위, 소장 등 소화기관 점막이 헐어버리는 것을 발견했다. 이후 셀리에는 ‘스트레스’라는 표현을 쓰기 시작했고 이 단어는 물리·공학의 영역을 넘어 오늘날의 보편적 언어가 되었다.
이처럼 스트레스가 물리·신체적 개념에서 출발했음에도 우리는 이를 흔히 ‘마음의 문제’로만 이해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기도 하고, 그래서인지 ‘다른 사람들은 잘 견디는데 왜 나만 이럴까’라며 자책하기도 한다. 그러나 셀리에의 실험이 보여주듯 스트레스에 먼저 반응하는 것은 우리의 몸일 때가 많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스트레스 때문에 감기가 걸리고 나이가 든다
배가 고프면 화가 나고 짜증이 나는 것처럼 육체의 고통은 너무나 분명하게 인식된다. 그래서 육체가 정신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반대로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 스트레스가 몸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는 사실은 쉽게 체감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정신적 스트레스가 신체에 미치는 영향은 오래전부터 꾸준히 보고돼 왔다.
1991년 「뉴 잉글랜드 저널 오브 메디슨(NEJM)」에 실린 한 연구는 건강한 성인 420명을 대상으로 스트레스 정도를 포함한 설문과 검사를 시행한 뒤 감기 바이러스를 주입하고 7일간 격리 관찰했다. 그 결과 감기 발병 여부는 나이, 음주, 흡연, 수면의 질, 백혈구 수, 면역글로불린 수치와 같은 신체적 면역 지표와는 뚜렷한 연관이 없었다. 오직 개인이 보고한 스트레스 점수와 관련이 있었다.
스트레스가 면역 저하를 넘어 세포 수준의 노화를 촉진할 수 있다는 연구도 있다. 2009년 엘리자베스 블랙번은 텔로미어와 텔로머라제 연구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텔로미어는 염색체 끝에 위치한 반복 DNA 서열로 세포 분열을 할 때마다 조금씩 짧아진다. 이는 마치 신발끈 끝의 플라스틱 캡처럼 염색체라는 끈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데, 일정 길이 이하로 짧아지면 세포는 더 이상 분열하지 못하고 노화와 사멸을 시작한다. 블랙번은 심리학자 에펠과 함께 만성 질환을 앓는 자녀를 돌보는 어머니들의 텔로미어 길이를 조사했다. 그 결과 어머니들의 자녀 돌봄 기간이 길수록, 주관적으로 느끼는 스트레스가 클수록 텔로미어가 더 짧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스트레스 지수가 가장 높은 집단은 가장 낮은 집단에 비해 약 10년 더 진행된 텔로미어 단축을 보였다. 이 연구는 2004년 「미국국립과학원회보(PNAS)」에 발표됐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몸과 마음은 하나
처음 병원에서 진료 과목을 표시할 때 별다른 생각 없이 전문 분야에 ‘신체화 장애’라는 키워드를 추가했다. 이를 표시한 정신건강의학과 의사가 전국에 거의 없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그 뒤로 원인을 알 수 없는 다양한 신체 증상을 호소하는 환자들이 우리 병원을 찾았다. 놀라운 점은 많은 환자들이 스트레스를 경험하면서도 그것이 신체 증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잘 모른다는 것이었다. 스트레스가 원인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이는 우리가 정신과 신체가 별개라는 이원론적 관점에 익숙하기 때문일 수 있다.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 칼 융은 몸과 마음이 하나이며, 각각은 그 하나의 두 가지 표현 양식일 뿐이라고 말했다. 외로움과 고독감이 사정없이 우리의 몸을 후려친다는 말은 단지 시적인 표현이 아닌 과학적인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정신적 스트레스가 몸으로 가는 길이 있다면, 몸을 통해 정신이 회복되는 길도 있다. 우리는 흔히 ‘마음을 고치려면 생각을 바꿔야 한다’고 여긴다. 하지만 말로 설명하고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몸에 깊이 남아 있는 긴장이 풀리지 않는 경우도 많다. 상담과 약물치료로 잘 치료되지 않던 노년의 만성 우울증 환자가 댄스 교실에 다니며 극적으로 좋아지는 경우를 본 적이 있다. 삶의 스트레스가 몸과 마음을 경직되게 만들었지만, 춤이라는 몸의 움직임이 마음을 이완시킨 것이다.
오늘도 일터가 전쟁터처럼 느껴진다면 잠시 모든 것을 멈추고 몸이 당신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귀 기울여 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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