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환자 이야기 고개를 들고 세상과 눈을 맞출 때 - 선천성 부정교합 환자 이야기 2026.08.06

수많은 환자들로 북적이는 병원을 거닐 때마다 궁금했다. 다들 어떤 아픔을 안고 있는지.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 
나는 선천성 부정교합을 치료 받았고 병원의 ‘희망 나누기 캠페인’의 수혜자로 모든 치료비를 지원받았다.

이러한 인연은 내 삶의 많은 걸 바꿔놓았다.

감추고 싶은 외모와 가정 환경으로 좀처럼 세상에 나를 드러내지 못했던 내가

이렇게 나의 이야기를 꺼낸다는 것은 일생일대의 용기이자 큰 변화다. 

 

나의 말할 수 없는 비밀 
나를 소개하기에 적당한 시작은 일곱 살의 어느 날일 것이다. 새로운 유치원에 갔던 날, 밤이 다 되도록 아빠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제야 그곳이 어려운 상황의 아이들이 지내는 공동생활가정이라는 걸 알게 됐다. 부모님의 이혼과 어려운 살림, 낯선 시설에서의 생활…. 모든 불행을 곱씹기도 전에, 아빠가 눈앞에 나타나지 않는 것만도 감당하기 어려운 나이였다. 일곱 살의 기도는 아무런 힘이 없었다. 다행히 쌍둥이 언니가 옆에 있었고, 공동생활가정을 총괄하시는 목사님과 사회복지사님의 든든한 보살핌이 있어 모든 날이 춥지만은 않았다. 다만 공동생활가정에 산다는 사실이 학교에 알려지면 도망치듯 학교를 옮겼다. 여러 번의 전학을 거치며 나만의 비밀은 쌓여갔다. 친구들과 ‘엄마가 해주는 밥’에 대한 대화가 시작되면 입을 꾹 다물었고 “너네 집에 놀러가자”라는 이야기에 겁을 먹었다. 나를 불쌍하게 생각하는 것이 싫어 친한 친구에게도 비밀을 털어놓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아빠 엄마와 연락이 닿았지만, 함께 살 수 있는 형편이 아니란 걸 알았기에 더 큰 욕심을 낼 수 없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콤플렉스가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심한 부정교합으로 얼굴이 삐뚤어져 있었다. “넌 왜 한쪽으로만 웃어?”라는 놀림이 늘 따라다녔다. 누군가의 시선이 내 입과 턱으로 향하는 것만 같아 마스크를 턱에 걸친 채 고개를 숙이고 다녔다. 외모에 부쩍 예민해진 중학생 시절, 사회복지사님은 서울아산병원의 ‘희망 나누기 캠페인’ 수술 치료비 지원 사업을 소개해 주었다. 드디어 얼굴을 치료할 수 있을 거란 기대감으로 성형외과 최종우 교수님을 만났지만 아직 뼈가 자라는 시기여서 성인이 된 이후에 치료해야 한다는 진단을 들었다. ‘나는 다 큰 것만 같은데….’ 집에 오는 길 내내 서럽게 울었다. 성인이 되기까지 너무나 긴 시간이 남은 듯했다.  

 

제 자리를 찾아가는 동안  
대학생이 된 이후 직접 서울아산병원 사회복지팀의 문을 두드렸다. 평생의 흠이라고 생각했던 안면 기형과 시설에 사는 점, 기초생활수급자라는 점으로 인해 치료비를 지원받을 수 있었다. 1년간의 치아 교정 후 양악수술을 진행했다. “부정교합이 심해 평소에 음식 씹기 많이 힘들었겠네.” 교수님의 말씀에 “이게 힘든 건지 몰랐어요”라고 대답했다. 어릴 때부터 익숙하게 받아들였을 뿐이다. 일반적이지 않은 나의 삶을 누군가 들여다보고 이제 달라질 거라 약속해 주는 것만으로 큰 위로가 됐다. 기다려온 수술 날, 마취 직전 열이 나는 바람에 그대로 수술이 취소됐다. 나는 또다시 맥없이 기다려야 했다. “도대체 얼마나 긴장을 한 거야? 누구나 하는 수술이고 내가 잘 해줄 테니까 다음엔 편한 마음으로 와!” 최 교수님은 털털하게 웃으며 바로 다음 달로 수술 일정을 잡아 주었다. 
수술 직후 입술은 얼굴 중앙에 놓여 있었다. 부기가 빠지면서 음식물을 씹을 때 어금니가 잘 맞물리는 느낌도 생소하지만 기분 좋았다. 최 교수님은 수술 전후 사진을 보여주며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지?”하고 웃었다. 명절 직전에 급히 잡힌 수술로 같이 생활하는 선생님을 대신해 간병을 자처한 아빠는 내 얼굴을 볼 때마다 너무 예쁘다며 호들갑스럽게 이야기했다. 병동 간호사분들께 드리겠다며 간식도 잔뜩 사왔다. 오랫동안 얼마나 미안한 마음으로 나를 바라보았는지 알 것 같았다. 이번 수술로 틀어져 있던 내 일상도 제 자리를 찾은 것 같았다.

 

간호사를 꿈꾸는 시간 
물론 치아를 2주간 고정시킨 채 생활한다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해 힘이 없고 산책도 할 수 없었다. 간병해 주는 아빠에게 괜한 성질을 부리기도 했다. 길지 않은 입원 기간이지만 환자가 되면 얼마나 예민해지는지, 무엇이 힘겨운지 알게 됐다. ‘나중에 간호사가 되면 환자의 마음을 잊지 말아야지.’ 간호학과 졸업을 앞둔 나로선 소중한 경험이었다. 동시에 간호사님들을 관찰하며 미래의 내 모습을 그려보았다. 교대할 때마다 병실에 찾아와 인사하고 혈관이나 약물 투여 등을 확인해주었다. 퇴원할 때 얼굴 밴드를 챙겨주며 “용감하게 잘 이겨냈다”라고 다정하게 응원해 주는 모습은 그동안 내가 그려온 엄마의 따뜻함과 닮아 있었다.  
사실 처음부터 내 꿈이 간호사는 아니었다. 학창 시절 나를 마음껏 발산할 수 있는 춤에 빠져 입시도 관련 전공으로 준비했다. 그러나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다. 차선책으로 선택한 것이 간호학과였다. 그러나 댄스 공연만 보고 나면 이루지 못한 꿈이 계속 마음에 남았다. 1년을 겨우 다니고 자퇴를 마음먹자, 목사님은 일단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원하는 걸 시작해도 늦지 않다며 나를 설득했다. 3학년이 되어 현장 실습을 나가면서 흥미를  비로소 느낄 수 있었다. 환자들에게 내가 무언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기쁨이 느껴졌다. 서울아산병원에서 수술과 입원을 거치며 더욱 전문적인 간호사가 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취업을 준비하는 요즘, 서울아산병원의 간호사가 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실감하고 있다. 다른 병원에서 열심히 경험을 쌓아서 언젠가 환자가 아닌 경력 간호사로 돌아오고 싶다. 간절히 바라면 감사한 인연은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  

 

또 하나의 바람 
간호사가 되면 하고 싶은 게 하나 더 있다. 나처럼 막막한 상황의 환자들에게 다양한 지원 기회를 연결해 주는 것이다. 남보다 한참 뒤처진 출발선에서 시작하는 이들에겐 세상에 어떤 기회가 있는지 알아낼 여력조차 없다. 나는 운이 좋게도 부족한 부분들이 결핍으로 남지 않도록 주변의 도움을 받아왔다. “내 얼굴 많이 틀어졌지?” 물어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고 반색하는 언니와 친구들, 성인이 되고도 경제적 자립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시설에 남도록 배려해주고 치료 지원 정보를 적극적으로 찾아준 목사님과 사회복지사분들, 그리고 조건 없는 치료 기회와 최고의 의술을 제공해 준 서울아산병원이 내 곁에 있었다. 덕분에 내게 주어졌던 과거를 이해하고 내가 만들어갈 미래를 상상할 수 있게 됐다. 나는 마음의 빚을 가지고 의료 현장으로 한 걸음 내디딜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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