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9일, 인천공항 입국장에 승객들이 모두 빠져나갈 때쯤 머리에 두툼한 붕대를 감은 남자아이와 어머니가 모습을 드러냈다.
키르기스스탄에서 온 여섯 살 우마르였다.
생애 처음 비행기를 탄 우마르의 목적지는 서울아산병원이었다.
두개골 골절과 함께 광범위한 두피 결손을 치료하기 위해 모자는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

아들의 사고 소식을 들은 날
“4월 1일 제 첫 출근날이었어요.” 어머니 나르키자 씨는 일터에서 딸의 전화를 받았다. “엄마, 우마르가 옆집 개들한테 심하게 물렸어요!” 친구와 놀다가 이웃집 울타리 너머로 떨어진 우마르를 세 마리의 대형견이 순식간에 몰려들어 공격했다고 했다. 우마르의 비명에 동네를 순찰 중이던 경찰이 달려왔고 급히 병원으로 이송하는 중이었다. 이어서 딸이 보낸 문자에 나르키자 씨는 두 다리에 힘이 풀렸다. 두피 대부분이 뜯겨 나간 우마르의 사진이 담겨 있었다. 진정제를 삼키곤 부랴부랴 택시를 잡아탔다. ‘우마르가 잘못되면 어떡하지?’ 살면서 이런 두려움은 처음이었다.
이틀간 중환자 치료를 받으며 우마르는 생명을 가까스로 지켰다. 하지만 두피 80%가 결손되면서 이를 재건할 방법을 현지 의료진은 찾지 못했다. 감염에 대비해 항생제 치료만 이어질 뿐이었다. 튀르키예를 비롯해 해외에 수술 가능한 병원을 알아봤지만 항공비와 치료비 등으로 10만 달러(한화 1억 3천만 원)가 필요했다. 어려운 살림에 다섯 남매를 키우는 부부에겐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우마르를 위한 모금 운동이 펼쳐졌지만 역부족이었다.
어느 날 병원장이 나르키자 씨를 진료실로 불렀다. 그곳엔 키르기스스탄에 매년 의술 전수를 위해 방문해 왔다는 서울아산병원 성형외과 의료진이 있었다. 이들은 우마르의 상태를 자세히 살피고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얼마 후 뜻밖의 소식을 전했다. 서울아산병원이 치료를 맡고, 아산사회복지재단이 항공료와 체류비를 모두 지원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믿을 수 없이 감사한 소식이었다. 그렇지만 비행기에 오르는 순간까지 과연 우마르가 회복될 수 있을지, 다시 학교로 돌아갈 수 있을지 머릿속의 물음표는 지워지지 않았다.
아이 인생에 필요한 치료를 선택한다는 것
“어느 날 키르기스스탄에 간 성형외과 서현석 교수에게 문자가 왔어요. 그때 우마르의 사진을 처음 본 거죠.” 성형외과 최종우 교수는 서 교수와 아이를 치료하기 위한 방법을 상의했다. 머리의 피부 조직이 광범위하게 결손돼 허벅지 등의 조직을 이식하는 유리피판술과 피부이식술을 해야 한다는 판단이 들었다. 현지에선 고난도 수술을 진행할 여건이 되지 않는다는 서 교수의 이야기에 한국에 데려와 치료할 방법을 찾아보자고 답했다.
아산사회복지재단의 해외취약환자 초청 진료 절차를 밟았다. 그리고 우마르를 한국에서 곧 만날 수 있었다. 다만 진료실에서 처음 만난 우마르는 최 교수의 예상보다 훨씬 심각한 상태였다. 양쪽 허벅지 조직을 결손 부위에 덮으려 했지만 우마르의 체구가 아직 작아 충분한 조직을 확보하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이 수술이 성공하더라도 이식한 부위에는 평생 모발이 자라지 않는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여섯 살 아이에게 최선의 치료는 무엇일지 최 교수는 고민했다. 남아 있는 두피를 확장해 결손 부위를 재건한다면 모발을 조금이라도 더 보존할 수 있었다. 한편으론 남아 있는 두피가 작고, 피부를 확장하다 보면 쉽게 벌어질 수 있어 ‘과연 될까?’라는 우려도 있었다.
그래도 우마르에게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라는 판단이 섰다. 양측 측두부와 뒤통수 쪽 두피 밑에 조직확장기 3개를 삽입하는 수술을 진행했다. 조직확장기가 손상되지 않도록 속도를 조절하며 상처가 벌어지거나 발열이 발생하지 않도록 매일 살피는 과정은 아슬아슬한 줄타기와 같았다. 피부과, 소아감염과, 영상의학과 의료진의 집중 치료가 두 달이 넘는 기간 동안 이어졌다. 주어진 비자 기한이 다가오고 있었다. 시간이 부족하다면 재건 수술은 키르기스스탄으로 서 교수가 직접 가서 진행할 방안까지 고려했다. 되도록 한국에서 치료를 진행하기 위해 귀국일에 맞춘 치료 계획을 세워나갔다.
다시 꿈꾸는 사이에
“아파~ 아파~”
드레싱을 하기 위해 머리 붕대를 풀던 의료진이 우마르의 외침에 멈칫했다. 혹시 많이 아픈지 묻기 위해 통역사를 바라보자, 통역사는 ‘아파’가 키르기스스탄어로 ‘엄마’라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긴장했던 의료진의 얼굴에 웃음이 퍼졌다. 우마르는 엄마를 찾았을 뿐인데, 모두의 웃음에 어리둥절해하다가 이내 따라 웃었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 의료진과 우마르 사이엔 함께하는 시간이 있었다. 의료진만 봐도 표정과 몸이 굳던 우마르는 눈을 맞추고 하이 파이브를 나눌수록 웃음을 찾아갔다. 치료가 고될 때는 집에 가고 싶다고 엄마에게 안겨 울먹였지만 돌아서면 언제 아팠냐는 듯 장난스러운 춤을 추며 밥 한 공기를 뚝딱 해치웠다. 한국의 병원 생활이 제법 익숙해지면서 어린이병원의 행사에는 가장 먼저 등장해 가장 늦게까지 남아 즐겼다. 우마르와 병원 곳곳을 산책하면서 엄마 역시 여유를 찾아나갔다.
병실에 있을 때면 우마르의 시선은 늘 창밖으로 향했다. 비행기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모습을 드러내면 두 팔 벌려 날아가는 모습을 흉내 내고 입으로는 엔진 소리를 흉내 냈다. 한국으로의 첫 비행은 파일럿이라는 꿈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집에 돌아가면 파일럿이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할 만큼 꽤 진지했다. 엄마 나르키자 씨에겐 이미 파일럿이 된 아들의 미래가 그려졌다. 4월의 사고 이후 우마르의 상처와 치료 외에는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던 것에 비하면 정말 큰 변화였다. “서울아산병원 의료진과 아산사회복지재단의 지원 덕분이에요. 우마르와 감사한 추억을 안고 돌아갑니다.”
마침내 9월 29일 조직확장기를 제거하고 확장된 두피로 결손 부위를 덮는 재건 수술이 이뤄졌다. 조금이라도 더 모발을 보존하기 위해 선택한 치료가 결실을 맺고 있었다. 우마르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져보며 신기해했다. 10월 15일, 우마르 모자는 의료진의 배웅을 받으며 고국으로 돌아갔다. 머리에 두툼한 붕대를 감고 한국에 도착한 지 98일 만이었다. 상처를 안고 떠나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우마르는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언젠가 파일럿이 되어 하늘을 나는 날, 처음 꿈을 키웠던 이곳에서의 시간을 어떻게 떠올리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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