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아산인 이야기 “결국 환자의 옆일 수밖에 없어요” 2022.07.12

고윤석 교수 편

 

 

울산의대 학생부학장으로 재임 중인 서울아산병원 흉부외과 최세훈 교수가 1989년 개원부터 현재까지 서울아산병원의 지난 30여 년을 이끌어 온 다섯 명의 선배 의사를 만났다. 울산의대 인문의학 강의에서 학생들에게 리더십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인터뷰를 진행한 것. 도전과 열정으로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병원의 성장을 이뤄 낸 선배 의사들의 경험과 노하우가 담긴 인터뷰 내용을 총 5편에 걸쳐 싣는다.

 

올해부터 인문의학을 크게 강조하는 방향으로 울산의대 교육과정을 개편했다. 그중 학생들에게 ‘리더십의 실제’를 보여주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서울아산병원을 만든 리더 몇 분과 대담을 진행했다. 진료하는 의사, 연구하는 의사, 경영하는 의사, 봉사하는 의사. 다양한 분야에서 정점을 경험한 분들과의 대담이 학생들에게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각각 한 시간가량 이어진 대담은 정말 값진 시간이었다. 그분들은 평생 의업에 종사하며 깨달은 바를 담담하게 나누었다. 그 말들을 삶으로 증명했다는 것을 아는 나로서는 담담함 속에서 깊은 울림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울림을 학생뿐 아니라 더 많은 이들, 특히 서울아산병원 식구들과 나누고 싶었다. 대담 내용의 일부를 이곳 지면에 옮겨 본다. 대담의 첫 시작은 고윤석 교수님이었다.

 

대담을 기획할 때부터 여러 교수님들께 드리고 싶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많은 신생 병원들 속에서 어떻게 서울아산병원은 30여 년의 짧은 시간 안에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병원이 될 수 있었나요? 개원 당시 교수님들은 이런 미래를 예상하셨는지요?

젊고 씩씩했던 전임의 시절인 1989년, 공부를 더 하고 싶은 마음에 당시 서울중앙병원에 지원했습니다.  다들 ‘도전과 열정’을 외치며 열심히 일했죠. 하지만 이렇게나 빠르게 국내·외 의료를 선도하는 병원으로 자리매김할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정주영 설립자께서 제안하셨던 ‘환자를 위한 좋은 병원’을 한번 만들어보자는 분위기가 있었어요. 대단한 잠재력을 지닌 젊은 교수들이 맘껏 뜻을 펼칠 수 있었고, 후배들이 무언가를 이뤄나갈 때 그것을 격려하는 선배 교수들이 있었죠.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좋은 분위기였습니다. 신생 병원의 장점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전통이 오래된 학교나 병원이라면 선배 교수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면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우리는 그렇지 않았죠. 족적을 따라가고 싶은 좋은 선배, 심포지엄에서의 격의 없는 토론. 재미있고 신났습니다.

 

교수님께서는 개원 초기부터 중환자의학을 전공하셨고, 의료윤리 분야에서도 많은 활동을 하셨습니다. 특히 중환자 의학이라면 지금은 기피 분야인데요, 어떻게 선택하셨는지요?

사실 제가 중환자의학을 시작하게 된 것은 처음부터 제가 작정했던 것은 아니었어요. 초대 호흡기내과 과장이셨던 김원동 교수께서 제게 먼저 권하셨습니다. 당시 미국에서는 호흡기내과 의사가 중환자실을 보는 것이 이미 자리를 잡은 상태였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어요. 그때 ‘우리나라 내과계 중환자실의 좋은 표본을 만들자’, 나아가 ‘우리 내과계 중환자실을 의료 수준의 편차가 큰 아시아 의사들을 위한 교육과 교류의 장으로 키워보자’는 목표도 세웠죠. 임채만, 홍상범, 허진원 교수 등 훌륭한 동료 의사들과 함께 해 그 원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중환자 치료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의료 윤리 분야도 마찬가지입니다. 초대 내과 과장이셨던 홍창기 교수님께서 제게 의료 윤리와 관련한 일을 해보지 않겠냐고 먼저 권하셔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뜻을 정하고 온갖 난관을 뚫고 우뚝 서는 흔한 영웅 서사들과는 다른 과정이네요?

네. 기회는 우연히 외부에서 제공되는 것이었어요. 그것에 성실하게 반응하고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나름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좀 다른 질문을 드릴까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의료 현장에서 있는 우리 모두는 육체적, 정신적인 한계 상황을 종종 경험합니다. 중환자실이 그 대표적인 장소라고 할 수 있는데요. 교수님께서 생각하시는 ‘번아웃’ 극복 방법은 무엇인가요?

번아웃–소진–은 병원에서 근무하는 누구나 한 번 이상 경험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것을 극복하는 힘은 결국 일상 그리고 습관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담당하는 환자가 안 좋아지고 이로 인해 보호자의 원망을 들을 때면 괴롭죠. 스스로 자책하는 마음이 생길 때 더욱 괴롭습니다. 하지만 의료진이 위로를 받고 견뎌낼 힘을 얻는 곳도 결국 환자의 옆일 수밖에 없어요. 마음이 괴롭고 몸도 피곤할 때, ‘가기 싫다, 하기 싫다’라는 마음이 들기도 전에 일어나서 환자 옆에 가는 것이 바로 습관입니다. 그 과정을 거쳐 환자 옆에 섰을 때 뜻밖의 선물 같이 번아웃을 이겨낼 위로를 받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습관은 금방 생기지 않아요. 내가 하는 일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 습관을 만들 수 있습니다. 확신을 가지려면 내 가치관이 무엇인지, 나는 무엇을 바라는지 등을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시간도 필요합니다. 인문의학적인 접근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안 되면 어떻게 하죠?

분명히 그럴 수도 있죠. 저는 여러분 모두가 자신을 한계까지 쭈욱 밀어붙여보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더할 나위 없이 최선을 다했다고 스스로 생각된다면, 설령 뜻한 결과가 아니더라도 기분 좋게 추락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 대목에 정말 동의한다. 홀가분하고 아쉬움이 남지 않는, 오히려 다음 단계로 나아갈 기반이 되는 기분 좋은 추락도 있다는 것을.

 

이 대담의 주제가 리더십입니다. 병원에서 일하는 우리 모두 직역을 막론하고 팔로워로 시작해 리더로 세워지는 과정에 있습니다. 또 누구도 혼자서는 리더가 될 수 없고 팀으로 모여야만 가능합니다. 리더의 자질, 혹은 팀워크의 키워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좋은 말들이 많겠지만 제가 생각하는 리더의 자질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자신이 하는 일에 확신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확신이 없이 어느 파트의 리더가 되는 것은 본인과 팀원 모두에게 좋지 않아요. 자신의 일에 대해 스스로 납득할 수 없다면 더욱 쉽게 번아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특히 자신을 바라보는 팀원이 있는데 에너지가 소진되는 것을 경험한다는 것은 리더로서는 매우 괴로운 일입니다. 만약 자신의 일에 확신이 생겼다면 좋은 리더는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가야 합니다. 가치와 목표를 팀원들과 공유하고 이들을 꾸준히 설득해야 해요. 확신을 팀원 모두에게 심어주는 것이죠. 팀 내에 충분한 확신을 전파했다면 리더는 같은 확신으로 한 팀이 된 팀원들에게 ‘저 사람도 힘들게 일하는구나’라는 정도의 신뢰를 주는 것만으로도 좋은 팀워크를 이룰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많은 이야기를 다 옮기기에 지면이 짧아 아쉽다. 탁월한 지식, 지혜, 술기, 판단력을 갖춘 동료들과 함께 윤리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서울아산병원에서 일할 수 있었던 것이 스스로에게 큰 축복이었다는 말로 대담을 마무리하는 고윤석 교수님의 깊게 반짝이는 눈망울을 글로 표현할 수 없어 또한 아쉽다.

 

 

※ 고윤석 교수는 1982년 한양의대 졸업, 한양대병원에서 전공의 과정 수료 후 1989년 서울아산병원 개원에 맞춰 전임의로 합류했다. 호흡기내과학과 중환자의학에 매진했으며 2008년 대한중환자의학회 회장을 역임하며 중환자 전문의 과정을 독립시켰다. 한국의료윤리교육학회 창립에 기여했고 2010년 학회장을 역임했다.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며 연명의료제도 법제화에 기여했으며 이번 울산의대 교육과정 개편에 인문의학위원회 위원장으로 참여했다. 현재는 자문임상교수로 시니어건강센터 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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