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아산인 이야기 시대를 앞선 병원과 나의 도전 2022.09.26

산부인과 원혜성 교수

 

▲ (좌) 2012년 태아경하 레이저 수술을 하는 원혜성 교수(가운데) /
(우) 2015년 태아치료센터 워크숍에서 태아션트 수술을 소개하는 원혜성 교수(오른쪽 첫 번째)

 

서울아산병원 산부인과 원혜성 교수의 지난 날은 우리나라 태아 치료의 역사다. 전공의 때 영상의학과에서 산전 진단을 배운 이후 태아 치료를 끊임없이 시도해오고 있다. ‘서울아산병원 태아치료센터에 오면 아기를 살릴 수 있다’는 확신을 산모에게 주고 싶은 목표는 줄곧 변함이 없다. 꼭 ‘원혜성’이 아니어도 충분한 시스템을 만들고 다음 세대를 키워가는 요즘의 고민까지 들어보았다.

 

태아 치료에 대한 관심은 언제부터 시작됐나요?

산부인과 목정은 교수님께서 영상의학과 유시준 교수님을 연결해주셔서 산과 초음파를 처음 접했습니다. 부인과 종양학을 하고 싶었던 제 뜻과는 달랐지만 결과적으로는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됐죠. 신기한 건 공부하고 내려가면 딱 그런 기형 환자가 와있었습니다. 진단 내용을 유 교수님께 보여드리면 콘퍼런스에서 잊지 않고 저를 칭찬해 주셨어요. “이거 원 선생이 본 겁니다”라고요. 열심히 노력해서 진단은 할 수 있게 됐는데 ‘당신의 아이를 살릴 방법이 없다, 미안하다’라는 말을 차마 못 하겠더라고요. 그래서 태아 치료에 파고들었습니다. 이 분야의 대가들이 있는 샌프란시스코 캘리포니아대학 태아치료센터로 연수도 다녀오고요. 그리고 김암 교수님을 설득해 2004년 태아치료센터를 개소했습니다.

 

태아 치료의 개념조차 없던 시절에 센터는 어떻게 성장했나요?

일주일 내내 산모를 받았어요. 지방 병원에서 태아에 복수가 찼다고 연락이 오면 당장 오라고 했죠. 당일 진료로 홍보 효과를 봤습니다. 또 혈액 안에 아기를 공격하는 항체가 있는 엄마들은 원인도 모른 채 아기를 두 번, 세 번 잃곤 했어요. 그런 케이스를 태아 수혈로 살려내니까 입소문도 났고요. 6층 분만실에서 3층 수술실로 내려가는 동안 큰일이 날 수 있으니 수술과 중환자 치료를 분만장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췄습니다. 시스템이 다 갖춰지기 전에는 다른 파트에 부탁할 일도 많았어요. “좀 도와주세요. 제가 밥 살게요”라고 하면 “당연하지, 원 선생. 뭐가 필요해?”라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구성원 모두 옳다고 믿는 걸 했기 때문에 이만큼 성장했다고 봐요. 

종종 후배들이 말해요. 태아치료센터는 한 번도 멈춘 적이 없다고. 션트삽입술, 태아 수혈, 태아 내시경치료, 고주파 전기소작술 등 끊임없는 시도로 국내 태아 치료를 리드해왔습니다. 이미영 교수를 비롯해 다음 세대도 키우고 있고요. 사실 새로운 도전마다 실패할 가능성이 있음에도 동의해준 부모님들께 가장 고맙습니다.

 

서울아산병원이어서 가능한 도전이었을까요?

우리 병원은 하겠다는 사람을 키웠고 생소한 도전도 말리지 않았어요. 덕분에 태아 치료가 블루오션으로 급부상했던 2010년대에 우리는 이미 멀리 앞서가 있었죠. 태아 치료와 관련된 파트들도 동반 성장했고요. 결국 시대를 보는 눈이 중요한데 그건 목정은, 유시준 교수님. 그리고 산과 시니어였던 김암, 이필량 교수님의 몫이었어요. 저는 실행을 한 거고요. 새삼 그분들이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리더는 구성원에게 적절한 역할과 의미를 주어야 합니다. 각자의 영역을 존중할 수 있는 기반이 되죠. 그렇지 않으면 균열이 생기고 더 이상 있고 싶지 않은 조직이 되기 쉬워요.  

 

▲ (좌) 2016년 국내 최초 태아 대동맥판막 풍선확장술을 시행하고 있는 원혜성 교수(앞줄 왼쪽 첫 번째) /
(우) 2019년 태아치료센터 워크숍에서 태아경하 레이저 수술을 설명하는 원혜성 교수(오른쪽 첫 번째)

 

혹시 교수님도 그만두고 싶었던 적이 있으세요?

몇 번의 위기가 있었죠(웃음). 분만실에 초음파 기계 하나 맡아 두고 제가 직접 포를 깔고 닦고 차트를 쓰면서 시작했으니까요. 힘들 때마다 저를 아끼는 선후배, 동료들의 지원과 환자들의 고맙다는 말 한마디에 그만둘 수가 없었어요. 

사실 목정은 교수님을 처음 찾아갔을 때 여의사는 안 뽑는다고 하셨어요. 당시 국내 빅5 대학병원 산부인과에 여교수가 없었던 걸 보면 벽이 높았던 거죠. 학연, 지연에 연연하지 않던 서울아산병원이어서 유리 천장도 뚫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분만실에 여자 당직실이 없어서 갱의실 장의자에서 쪽잠을 자곤 했습니다. 간호사분들이 잠깐 쉬어가는 공간을 본의 아니게 뺏은 건데, 저도 그때는 궁색한 처지라서…. 레지던트 4년차가 되어서야 여자 당직실을 만들어달라는 이야기를 겨우 꺼냈습니다. “당직 때 잠을 왜 자나?” 호통을 듣긴 했지만 그렇게 하나씩 시스템을 만들었어요.  

 

서울아산병원의 성장을 경험한 세대로서 고민과 당부가 있을까요?

1990년에 입사하자마자 수해를 경험하면서 두 가지를 느꼈습니다. ‘이렇게 멋진 병원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구나’라는 압도적인 경험과 ‘우리는 이겨낼 수 있구나’라는 확신. 그런 경험을 가진 세대에게 병원에 대한 애착은 여전히 강하기만 합니다. 이제는 다음 세대와 융화할 방법을 찾아야죠. 열심히 하는 사람, 진정성 있는 사람에게 믿고 맡기는 것이 시작일 겁니다. 제가 생각하는 ‘초심’이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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