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환자 이야기 한국에서 되찾은 미소 2022.12.01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에서 한 청년이 찾아왔다. 마다가스카르에서도 전기가 통하지 않고 코로나바이러스의 존재조차 모를 만큼 외부와 단절된 오지 마을 출신이었다. 스물두 살이 되도록 마을을 떠나본 적이 없는 그가 20여 시간에 걸친 비행길에 오른 이유는 딱 하나였다. 서울아산병원에서 10여 년간 병명조차 알 수 없던 질병을 치료하고 싶다는 것. 그에게는 일생일대의 용기이자 마지막 희망이었다. 

 

“모두가 저에게 신의 저주가 내렸다고 합니다.”

플란지를 처음 만난 건 이재훈 선교사였다. 마다가스카르에서 의료 선교를 펼치던 그가 한 오지 마을에 갔을 때다. 그곳에 ‘징그러운 혹을 가진 아이’, ‘귀신 들린 아이’로 불리는 청년이 있었다. “플란지의 얼굴을 보자마자 ‘도대체 밥은 먹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입안의 가로 15cm, 세로 13cm, 너비 10cm의 혹이 입을 다 가리고 있었으니까요.” 플란지는 8살 때 어금니 쪽의 통증으로 어머니가 치아를 뽑은 이후에 작은 염증이 생겼다. 마을에는 이를 치료할 병원이 없었다. 염증은 중심거대세포육아종으로 진행되면서 점점 더 흉측하게 커졌다. 사람들은 질병이 아닌 저주로 여기기 시작했다. 플란지와 가족이 지은 죄 때문이라고도 했다. 친구들의 외면과 괴롭힘에 플란지는 글도 배우기 전에 학교를 그만둬야 했다. “플란지와 이야기를 나눴을 때 하고 싶은 것, 바라는 것이 정말 많았습니다. 이제 겨우 사춘기를 지난 청년인 거예요. 자신의 어릴 적 얼굴을 기억하면서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 했습니다. 제가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고민이 커졌죠.”

 

이 선교사는 플란지를 치료해 줄 한국 병원을 백방으로 찾았다. 2018년에 아산상 의료봉사상을 수상하면서 인연이 닿은 서울아산병원과 아산재단에서 답이 왔다. 치료 지원을 약속받고 플란지와 가족에게 알렸다. 낯선 나라에 가서 어려운 수술을 각오해야 한다는 설명에도 플란지는 전혀 움츠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죽는 한이 있어도 무엇이든 해보고 싶어요”라고 했다. 처음엔 주저하던 가족도 저주를 풀 수 있다는 기대감에 젖었다. 본격적인 한국행을 준비하면서 출생신고부터 했다. 정확한 생일을 아무도 몰라 대략의 나이를 계산해 2000년 1월 1일생으로 등록했다. 2022년 8월. 드디어 플란지는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몸과 마음을 고치는 게 성형외과의 역할이니까요.”

“2주 동안 병원 기숙사에서 지내면서 열심히 먹어 봅시다!” 성형외과 최종우 교수는 플란지에게 수술 전까지 숙제를 주었다. 플란지는 영양 결핍이 의심될 정도로 야윈 상태였다. 헤모글로빈과 알부민 수치도 평균치에 한참 모자라 전신 마취가 아예 불가능했다.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빨간불이 켜지자 수술 일정을 계획할 수 없었다. 자세한 검사를 진행할수록 최 교수의 안타까움은 커졌다. “플란지가 앓는 병은 중심거대세포육아종으로 100만 명에 한 명 정도 나오는 드문 병이에요. 초기에 발견했다면 약물로 치료할 수 있었을 텐데 10년 이상 방치되면서 턱뼈가 변형되고 안쪽의 치아들도 빠진 것 같아요. 수술밖에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플란지는 2주간 체력을 많이 끌어올리며 최 교수의 시름을 덜어주었다. 아프리카 청년의 입에도 한국 음식이 잘 맞은 듯 했다. 그 사이에 의료진은 치료 계획을 세웠다. 구강외과에서 종양을 제거하면 최종우 교수는 다리뼈와 동맥, 정맥을 포함한 피부를 목 부위에 이식하기로 했다. 뼈를 조각조각 정확하게 맞춰야 잘 아물 수 있기 때문에 시뮬레이션과 3D프린터를 이용해 정확도를 높였다. “플란지와 영상 통화로 만났을 때가 기억나요. 목소리가 아주 작고 말이 없었어요. 어떤 인생을 살아왔을지 대번에 그려졌죠. 선천성 기형이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진 환자분들을 치료하면서 사회적 낙인으로 고통받는 걸 많이 봤습니다. 그분들이 가장 행복해하는 건 아주 단순해요. 사람들이 자신을 보통 사람처럼 봐주는 거죠. 플란지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그러한 사회적 낙인을 제거하는 게 저와 의료진의 치료 목표였습니다.”

 

9월 16일. 아침 일찍 수술이 시작됐다. 성형외과와 치과, 이비인후과가 협진해 미리 계획한 대로 수술을 이어갔다. 종양 자체가 워낙 거대해서 혈관이 많이 분포된 부위에선 출혈도 많았다. 플란지의 몸과 마음을 재건하는 수술은 8시간 만에 끝이 났다. 이제 새로운 일상을 펼칠 차례였다.

 

“저도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는 선교사가 되고 싶어요.”

최 교수는 플란지가 수술 후 안정될 때까지 상태를 꼼꼼히 확인했다. 그에 따라 귀국 날짜가 정해졌다. 귀국 소식을 들은 의료진이 한데 모였다. 환자복을 벗은 플란지는 여느 스물두 살 청년과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눈인사하며 마스크를 벗자 수술실에서만 플란지를 봤던 의료진 몇몇은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아직 붓기가 남아있긴 하지만 선홍색 종양이 있던 자리를 매끄러운 피부가 덮고 있었다. 최 교수가 대표로 축하를 건넸다. “플란지에게도 어려운 치료 과정이었을 텐데 잘 버텨줘서 고마운 마음입니다. 치아 임플란트까지 받고 가면 좋을 텐데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아서…”라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플란지는 그 내용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먼저 최 교수를 안았다. 애정 어린 의료진의 마음이 충분히 전해진 듯했다. 플란지는 빨리 고향에 돌아가서 사람들에게 자신의 바뀐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글을 배우고 자신처럼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선교사가 되겠다는 꿈도 들려주었다. 플란지의 입가에는 아직 어색하지만 확실한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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