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환자 이야기 귀분 씨가 사는 법 2023.09.18

 

 

눈에 띄기 어려운 곳에 있어 매년 건강검진에서 발견되지 않았던 종양이 모습을 드러냈을 땐 이미 커질 대로 커진 게 분명했다. 귀분 씨는 5년 전 서울아산병원 종양내과 박숙련 교수를 만나 복막암으로 길어야 3개월일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직 전이된 곳은 없다는 희망과 언제 어떻게 악성으로 변할지 모른다는 불안이 함께였다. 속으론 덜덜 떨렸지만 귀분 씨는 자신했다. “교수님, 지금은 가망이 없는 것 같아도 제대로 이겨내서 기록 한번 세울 테니까 잘 좀 부탁합니다.”

 

죽음 직전에서

“처음에는 소화가 잘 안되길래 동네 병원에 갔어요. 약을 먹어도 차도가 없어서 내시경 검사를 했죠. 그랬더니 복막에 뭐가 보인다고 해요. 근데 거긴 수술하기 힘든 자리라더라고요. 의술이야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니까 어떻게든 낫겠지 하고 부산에서 서울로 온 거예요.” 예약이 빨리 잡힌 대형 병원도 가보고, 암 치료를 잘한다는 의사도 찾아봤지만 귀분 씨는 서울아산병원에서 박숙련 교수를 만나고 나서야 ‘여기다’ 싶었다. 남편이 오랫동안 심장 치료를 받아온 병원이어서 친근한 곳이기도 했다. 

무거운 진단을 받고 돌아온 집에는 다음 계절을 기다리는 울긋불긋한 옷들이 가지런히 걸려있었다. ‘한 치 앞도 모르고 부지런히 챙겨놨구나.’ 병원에 갈 때 입을 옷만 남기고 미련 없이 버렸다. 주방의 조리 도구들도 마찬가지였다. 평생 정갈하게 써왔다고 자부했지만 혹시 코팅이 벗겨진 곳에서 중금속이라도 나올까 봐 겁이 났다. 정말 무서운 건 항암 치료를 시작하면서 나타난 몸의 변화였다. 손발의 피부가 갈라지고 새까맣게 변했다. 처음 만져보는 피부 촉감이었다. 물만 닿아도 마디마다 아프고 시렸다. 기력을 모두 잃어 진료에선 어떤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하루는 병원에 가려는데 남편이 신발을 신겨 준다고 쪼그려 앉더니 울더라고요. 자기가 오래 사는 바람에 내가 신경 쓸 게 많아 아픈 거라면서.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두고 어떻게 아프다고 불평하겠어요? 이 사람만 남기고 죽을 수 없겠다 싶은 거지.”

 

우리의 악전고투

귀분 씨의 남편은 25년 전 심근경색을 진단받았다. 마흔여덟. 한창 일할 나이에 일반인 심장의 19%만 기능할 뿐이었다. 심장 치료를 가장 잘한다는 병원을 찾아 서울아산병원에 왔다. 남편은 인공심폐기를 단 채로 중환자실에서 한 달을 보냈다. 곧 죽을 사람처럼 기저귀만 차고 누워있는 모습을 보면 견딜 수가 없었다. 귀분 씨는 지나가던 의사의 가운을 잡고 애원하기도 했다. “제발 우리 남편 좀 살려주세요. 이대로 퇴원하면 또 응급실에 가게 될 게 뻔하고 서울에 왔을 때 꼭 해결해야 합니다.” 남편은 관상동맥 우회술을 받은 뒤 고비를 넘기고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귀분 씨는 가장의 역할과 간병을 병행해야 했다. 평소 그녀의 음식 솜씨를 잘 아는 사람들이 잔치 음식을 의뢰하기 시작했다. 소소한 시작이었지만 알음알음 찾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러나 일 년에 남편의 약 값으로만 2천만 원이 넘는 생활은 버거운 게 사실이었다. 전교 1~2등을 다투며 서울의 상위권 대학 진학을 목표하던 아들을 귀분 씨가 붙잡았다. “부산 집에 있으면 하숙비랑 밥값은 안 들잖아. 나중에 아빠가 좀 나아지면 그때 너 하고 싶은 거 했으면 하는데….” 아들은 두말하지 않고 부산에 남았다. 8년 후 남편은 심장이식을 진행했고 아들은 번듯한 회사에 입사해 제힘으로 서울에 정착했다. “각자 고생을 많이 했죠. 특히 아빠가 아픈 바람에 일찍 철든 아들이 여전히 제 눈에는 짠하고 안쓰러워요. 이제 좀 살 만하니까 또 암에 걸려서는…. ‘다른 욕심은 안 부릴 테니까 하늘아 나 좀 봐주라~’ 하는 마음으로 살았어요.”

 

천천히 들려오는 소식

“어머니, 암이 좀 줄었어요.” 항암 4개월차에 들은 소식이었다. 한시름 놓였다. 박 교수의 이야기를 교과서라 생각하고 모범생처럼 따랐다. 약을 빠짐없이 먹고 밥도 신선한 재료로만 만들어 꼭꼭 씹어 먹었다. 남들이 말하는 건강 정보에는 아예 귀를 닫았다. “남편이 새벽마다 약을 먹으러 일어나면 저도 먹을 물을 데우러 일어났어요. 중환자 둘이 사니까 천천히 식사하고 산책하며 하루를 보내는 거예요. 그렇게 4년을 보내니까 좋은 소식도 들리더라고요.” 작년 4월이었다. 박 교수가 환히 웃었다. “약 효과가 아주 좋아요. 200~300명 중에 1명 있을까 말까 한 환자분이세요.” 그동안 약을 한 번도 바꾼 적이 없었을 만큼 맞춤형 처방이었다. 매번 금식 상태로 혼자서 서울에 진료받으러 오는 길이 힘들어도 점점 나아지고 있으니 마음마저 고되진 않았다. “교수님, 처음에 수술을 못 한다고 들었을 때 ‘나는 이제 답도 없는가 보다’ 했는데 수술을 안 하고도 이렇게 좋아질 줄은 정말 몰랐어요. 제가 음식을 좀 만들 줄 알아서 교수님께 가장 좋은 걸로 대접하고 싶은데 맨날 입으로만 고맙다고 해서 진짜 부끄럽습니다.” “어머님이 몸조리를 잘해주셔서 저도 진료하는 보람을 느껴요. 그거면 충분합니다!”

 

이미 충분한 인생

올해로 남편은 심장 치료 25년, 귀분 씨는 암 치료 5년차다. 둘 다 여전히 살아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때면 “서울아산병원 교수님들이 참 용하지?”라는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조금 더 나아지면 독거노인이나 결손 가정을 도우러 다닐 작정이다. “남편이 청소 하나는 잘하거든요. 나는 요리를 잘하고. 생명을 빚지고, 귀인 같은 교수님을 만난 것이 절대 우리 덕이라고 생각 안 해요. 다 세상에 갚아나갈 것들이지.” 귀분 씨는 질병으로 얼룩진 일상에도 삶의 건강한 순간을 발견할 때가 있다. 단출한 살림에도 충분하다고 느낄 때. 받은 것에 감사해 베풀 날을 꿈꿀 때. 아끼는 사람과 해 질 녘을 함께 맞을 때. 그 이상은 바랄 것이 없다고 자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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