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덕우 교수는 경북 김천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스무 살에 혈혈단신 상경한 그가 처음 접한 도시는 지금껏 알던 세상과는 달랐다.
훨씬 좋은 환경에서 자라온 도시 아이들을 보며 이유 없는 반항심에 방황했다. 성적이 128등까지 떨어졌다. 유급은 겨우 면했지만, 마음을 잡을 수 없었다. 본과에 올라와 진짜 경쟁이 시작됐다. 그때부터였다.
“맨손으로 승부하던 시골 소년의 생존 본능이라고 할까요. 본격적인 의대 생활의 시작을 알리는 총성이 들리는 순간, 승부 근성이 발동했지요.”
1998년 수련 병원을 선택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모교 병원이 아닌 아무 연고도 없던 서울아산병원을 지원했다. 서울아산병원 내과 레지던트에 선발된 일은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다.
“이곳의 선배들은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후배들을 위해 발 벗고 나서 좋은 기회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선택은 옳았다. 새로운 기회의 문이 열렸다. 전공과를 선택해야 하는데, 내과지만 수술복을 입고 시술하는 심장내과의 다이나믹함에 끌렸다. 그러나 심장내과는 함께 한 동기 중에서 지쳐 떨어지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힘들었다. 다시 발동한 헝그리 정신.
그는 26명의 동기 중 유일하게 심장내과를 지원했다. 몸은 고됐지만, 쟁쟁한 선배들 아래서 연구할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전임의를 막 시작하던 2004년 마지막 회진을 마치고 의국으로 돌아오면 선배들은 논문을 읽거나 공부를 하고 있었다. 집에 있는 가족들 얼굴이 아른거렸지만, 괜히 눈치가 보여 도저히 집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기다리다 시계를 힐끔 쳐다보면 어느덧 시간은 자정을 훌쩍 넘겨 새벽 2시. ‘도대체 뭘 해야 하지?’ 책상 위에 쌓인 논문을 뒤적이며 2달을 보냈다.
“2달은 새로운 습관을 들이기에 충분한 시간이더군요.”
연구자로서 본격적인 첫발을 내디딘 것은 전임의 2년 차 때부터였다. 연구를 좋아하고 적성이라고 느끼면서도 결과를 내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낮에는 임상의로서 진료와 시술을 하고 저녁이면 돌아와 다시 연구에 매달렸다.
부족한 시간을 메우려 밤을 꼬박 새우는 날도 부지기수였다.
그렇게 3달간 완성한 첫 번째 논문을 미국 유명 심장학회 학술지에 제출했다.
2주 후, 결과는 ‘REJECTION(거절)’. 쥐구멍에라도 숨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잠도 오지 않았다. ‘내가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았는데…’
짝사랑에 실패한 사람처럼 2주간 마음의 병을 앓았다. 실패는 아팠다.
그러나 아픔도 경험이었다.
“그런 경험을 하고 나니 비슷한 시련이 와도 대비가 되더군요. 게다가 더욱 분명한 사실은 두 번째 논문은 첫 번째 논문보다 쉽게 진행됐다는 것이었죠.”
이후 스텐트 시술의 유효성과 안전성, 수술 치료와의 비교, 진단과 위험률 예측 등 협심증과 심근경색 환자를 대상으로 한 대규모 임상연구를 주제로 국제 학술지에 지속해서 논문을 제출하며 내공을 쌓아갔다. 그 과정 중에도 수많은 시행착오와 실패는 있었다.
“그러나 지금껏 경험해 온 것들이 현재의 결과를 위해 조금씩 축적되고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실패와 시행착오도 절대로 낭비가 아니었죠.”
2012년 3월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미국심장학회(ACC)에서 그는 전 세계에서 매년 한 명에게만 수여되는 ‘올해의 최고 젊은 과학자상’을 아시아 최초로, 세계 최연소로 수상했다. 그간의 많은 고민과 좌절 그리고 실패가 떠올랐다. 실패는 간절함을 가져왔다.
“연구자는 무엇인가에 굶주리지 않으면 계속 이뤄나갈 수 없어요.
‘이 연구를 하고 싶다’라는 간절함이 있어야 새로운 연구를 시작할 수 있고, 그 연구에 절대량의 시간이 축적되어야만 결과가 나옵니다.”
간절함이 끝없는 열정의 원동력이었다. 그리고 간절함의 또 다른 이유.
“심장내과 의사에게 환자는 평생의 동반자입니다. 가족 같죠. 환자를 만나는 일이 좋아 임상의를 선택했고, 진료실에서 해결하지 못한 문제에 집중하면 연구를 멈출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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