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 뭔가 잡혀요.” 유미 씨는 의사에게 이어 말했다. “그런데 이거 암이면 안 돼요!” 세 아이가 떠올라서다. ‘나는 마흔 살에도 친정엄마의 손길이 필요한데, 일곱 살 막내도 최소한 10년은 엄마가 있어 줘야지….’ 그러나 암은 이미 몸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제껏 가꿔온 아이들의 울타리를 스스로 허물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었다. 엄마의 자리에 돌아가겠다는 의지로 서울아산병원에서 수술과 항암, 방사선 치료를 시작했다.
이미 일어난 일에 순응하면서
유방암 수술 후 5년을 조금 넘긴 2012년, 완치에 다다랐다고 여길 즈음이었다. 계속 어지럽고 기침이 나오기 시작했다. 코피가 멈추지 않아 찾은 동네 병원에서 혈액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서울아산병원에 진료를 예약했지만 부축 없이는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 응급실을 거쳐 알게 된 병명은 백혈병이었다. 또다시 아이들에게 엄마의 병을 알려야 한다니, 유미 씨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망설이는 며칠 사이에 큰아들이 엄마의 눈을 피하는 느낌이 들었다. 고백해야 할 사실보다 아들의 알 수 없는 행동이 더 마음에 걸렸다. 무엇이든 대화해야 했다. 아들을 불러 앉혔다. “병원에서 엄마가 백혈병이라는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들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눈치채고 있었구나!’ 당황한 건 유미 씨였다. “백혈병이라고 TV에 나오는 것처럼 다 죽는 거 아니야. 엄마 잘할 수 있어. 두고 봐!” 우는 아이를 달래면서 또다시 이런 일을 겪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골수를 이식받고 반년간의 입원 생활에서 병실 친구들을 많이 얻었다.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특별한 인연이었다. 골수 이식을 하루 앞둔 한 환자가 초등학생 아들의 목에서 골수를 뽑아야 한다며 속상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유미 씨는 “나중에 아들이 내가 엄마를 살렸다고 뿌듯해할 거야”라며 위로했다. “그렇겠지? 수술 끝나고 만나, 언니~” 그 대화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연락이 닿지 않았다. 급성 폐렴으로 이식도 받지 못하고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렇게 아끼던 아들은 어떡하고….’ 엄마가 되면서 느낀 벅찬 행복이 어느 때는 감당하기 버거운 것이기도 했다. 유미 씨는 황망한 소식에도 울 수 없었다. 이식 후 숙주 반응이 눈으로 오면서 평생 눈물을 흘리지 못할 거라는 의사의 말 대로였다. 분출하지 못한 슬픔은 가슴에 맺혔다.
가끔은 도저히 이겨내기 힘든
유미 씨는 무사히 속초 집으로 돌아왔다. 차츰 병색을 지워가던 2015년. 식사하다가 작은 고기 조각이 목에 걸렸다. 물조차 넘어가지 않았다. 영문도 모른 채 혼자서 병원을 찾았다. 이번엔 식도암이었다. 상담간호사마저 안쓰러워하는 표정이었다. 정말 마지막이겠다는 생각에 진료실을 나와 남편에게 전화했다. “나한테 조금만 더 잘해주지. 우리 더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았잖아….”
종양내과 박숙련 교수를 만났다. 암 위치가 좋지 않다는 이야기에 조바심이 들었다. 몸에 좋다는 음식을 챙겨 먹다가 간 수치가 오르는 바람에 치료를 미루는 일도 생겼다. ‘여태 잘하다가 이런 미련한 짓을 하다니, 정신 차리고 교수님 말씀만 잘 듣자!’ 유미 씨는 제한된 조건이 많은 환자였지만 강릉아산병원에서 항암과 방사선 치료로 최대한 암 크기를 줄여나갔다. 다행히 수술을 논의할 수 있는 상태까지 끌어올려 다시 서울로 올라올 수 있었다. 외과 의료진은 식도와 기도를 들어내는 수술을 하고 나면 말을 하지 못할 거라고 했다. 유미 씨는 수술 내용도 미리 알아보고 마음의 준비도 했지만 선뜻 수술을 받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 정도의 의지로는 수술 결과를 견딜 수 없습니다.” 의료진은 망설이는 유미 씨를 단호하게 종양내과로 돌려보냈다.
천천히 한 걸음씩
“수술 날짜는 잡았어요?” 박숙련 교수가 물었다. 유미 씨는 떨리는 목소리로 실토했다. “교수님, 이제 제 몸을 못 믿겠어요. 수술해서 더 이상 암이 생기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다면 하겠는데, 이 수술마저 잘못되면 못 견딜 것 같아요.” 박 교수는 어려운 상황이라며 천천히 해결해 보자고 했다. “담당 환자가 수술까지 끝내야 후련할 텐데 제 마음을 이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 뒤로 박 교수는 항암제 양을 세심히 조절하면서 치료가 버거우면 쉬었다 해도 좋다며 부담을 덜어주었다. 최선의 치료를 받고 있다는 믿음은 힘들 때도 ‘항암제가 암세포를 죽이느라 애쓰고 있구나’라고 여길 수 있는 힘이 되었다.
유미 씨는 병원의 어딜 가나 유명인사였다. 유방암과 백혈병, 식도암 병력을 들은 병동 환자들은 하나같이 “나는 별것도 아니었네” 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예전에 만난 간호사들이 곳곳에서 먼저 반가운 인사를 건넸다. 무균실에서 나올 때는 의료진과 환자, 보호자들이 “잘 견디셨습니다”라며 박수를 쳐주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2018년. “이제 항암 치료를 멈춰보죠!” 박 교수의 이야기에 불안이 앞섰다. ‘숨어있던 암세포가 나타나면 어떡하지?’ 그러나 3개월 간격의 추적 관찰은 점차 6개월로 벌어졌고 때로는 암 환자인 걸 잊을 만큼 컨디션이 좋았다. 오랜 만남을 이어온 박 교수는 자녀들의 입학과 졸업, 군 제대 등의 근황을 때에 맞춰 물었다. “그걸 다 기억하세요?” 하고 놀라면서 유미 씨는 새로운 소식을 매번 신이 나서 말했다. 완치를 항상 확신하지는 못해도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상기시키는 대화였다. 수술을 받지 않고도 8년째. 유미 씨는 오늘도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어느새 다 자란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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