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환자 이야기 십 년 동안 스무 번의 척추측만증 수술 "무사히 졸업했어요" 2024.05.23

수술 날은 매번 빠르게 돌아왔다. 척추측만증을 안고 태어난 정은이(13)는 척추 성장에 맞춰 1년에 두 번씩 수술을 받았다. 벌써 10년째. 끝이 오긴 할까 싶으면서도 수백 번 상상하던 최종 수술 날이 드디어 찾아왔다. 정은이는 10년 전 수술을 막 시작하던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로 소감을 대신했다. “앞으로 오랫동안 수술할 거고 사람들의 시선도 좋지 않고 많이 외로울 거야. 그런데 생각보다 괜찮기도 하고 그렇게 힘들지도 않고 병원에서 좋은 분들을 만날 테니 10년만 잘 버텨보자!”  

 


모든 순간이 도전

정형외과 황창주 교수는 오래전 정은이의 검사 사진을 모니터에 띄웠다. “돌도 되지 않았을 때의 척추가 이미 60도였어요. 누가 봐도 심한 측만증이었죠.” 척추 모양도 문제지만 호흡곤란이나 폐부전 등으로 이어져 생명에 위협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국내엔 치료법이 없었다. 의료진은 갈비뼈와 척추를 연결해 성장을 보존하며 교정해 나갈 기구를 수소문했고 이를 개발한 미국의 교수에게 초청 수술을 제안했다. 그리고 보건복지부와 건강보험심사평가원 등에 수술 필요성을 설득했다. 1년여의 준비 끝에 이제 막 세 돌을 넘긴 정은이는 국내 최초 VEPTR(인공 확장형 금속 늑골 수술법) 수술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 수술은 시작에 불과했다. 반년마다 수술과 장비 보수 교체가 이어졌다. 뼈가 워낙 약해 기구는 쉽게 빠졌고, 척추가 들러붙으며 몸의 균형이 무너지기 일쑤였다. “의료진으로서 매 순간이 도전이었어요. 수술할 때마다 기대대로 되지 않아 해결책을 찾아야 했죠. 마지막 수술에선 척추 하나를 완전히 들어내야 했어요.” 치료이긴 하지만 아이가 느낄 고통을 떠올리면 황 교수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도 정은이는 만날 때마다 밝은 모습이었다. “고맙고 대견했죠. 끝까지 치료해 내고 싶은 욕심도 들고 정은이가 잘 견뎌 주기를 항상 기도했습니다. 정은이는 저에게 특별한 환자였으니까요.”  

 

 

엄마도 시간이 필요해

엄마는 임신 기간 중에 태아에 문제가 있는 걸 알았다. 각종 검사를 받으며 울기도 많이 울었다. “지금 생각하면 괜한 일을 했어요. 장애가 있다고 아이를 포기할 것도 아닌데.” 낳아서 키우다 보면 나아질지 모른다는 엄마의 희망은 매일 무너져 내렸다. 정은이의 허리는 점점 더 휘어져 까치발을 들고 걸었고 시선도 틀어졌다. 보조기로는 치료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이미영 전문간호사님께 전화해 ‘내가 뭘 잘못해서 이렇게 아픈 아이가 태어난 걸까요?’라며 운 적도 있어요. 엄마 때문이 아니니 흔들리지 말라는 이야기가 큰 용기가 되더라고요.” 

 

의료진의 노력 끝에 국내 최초의 수술을 받을 기회가 찾아왔다. 엄마는 행운을 잡았다는 기쁨과 기나긴 치료를 시작하는 두려움이 동시에 스쳤다. 불과 네 살인 딸에게 수술을 설명할 방법도 알지 못했다. “정은아, 의사 선생님이랑 우주선을 타러 갈 거야!” 순순히 우주선에 승선한 정은이가 깊은 잠에 빠진 사이, 의료진은 S자로 휜 척추에 2개의 장치를 고정시켰다. 엄마는 물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고 수술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일순간에 키가 쑥 크거나 허리가 곧아질 순 없었다. 엄마는 정은이의 체형을 가리는 화려하고 큰 원피스를 입히고 항상 안거나 업고 다녔다. “어느 날 문득 제가 남의 시선을 의식할수록 정은이도 움츠러든다는 걸 알았어요. ‘내가 이러면 안 되겠구나!’ 정신이 번뜩 들더라고요. 딸의 질병에 당당해지기까지 5년은 걸린 거 같아요. ‘엄마가 아프게 태어나게 해서 미안해’하면 ‘아프게 태어나서 내가 더 미안하지’라는 정은이를 보며 버틸 수 있었어요.” 

 

 

설움과 두려움의 성장통

“저도 달리고 싶죠~” 정은이는 체육 시간이면 벤치에 앉아 구경하는 게 전부였다. 오래 걸을 수 없어 체험학습은 늘 불참이었다. 그러다 보니 친구들이 귀찮아하는 대피 훈련마저 부러웠다. 새 학년이 되면 ‘넌 장애인이야?’ ‘혹시 죽을병에 걸렸어?’라는 질문부터 마주했다. 그때마다 꾹 참았다가 집에 가서 울었다. 몇 번의 새 학년을 맞이하고 나서야 당당히 대답할 수 있었다. “심하게 아픈 것도 아니고 불치병도 아냐. 언젠간 나을 감기 같은 거지!” 

 

그런데 수술 후 통증만은 익숙해지지 않았다. 마취에서 깰 때, 그리고 진통제를 맞고 나면 속이 울렁거리고 아팠다. “괜찮아?”라고 묻는 엄마에게 “괜찮을 리 없잖아….” 날카롭게 답하기도 했다. 엄마는 수술이 힘들면 그만둬도 된다고 하지만 조금이라도 허리가 펴지고 키가 크려면 어쩔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더 속이 상했다. 수술 날이 다가오면 악몽도 찾아왔다. 밤 중에 안방 침대로 들어가 얼굴을 파묻고 우는 날이 많았다. “엄마, 내가 죽는 꿈을 꿨어. 수술하고 못 일어나면 어떡하지?” “엄마가 수술실 밖에서 기다릴 거야. 너도, 나도 어디 안 가! 그러니까 교수님만 믿자. 알았지?”  

 

 

 

두근두근 졸업식

지난해 11월 최종 수술을 받고 3개월간 안정을 취했다. 어릴 때부터 ‘뼈가 약해서 무리하면 안 돼’라는 말을 수없이 들어온 정은이는 보조기를 풀려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허리는 제법 곧게 서있었고 더 이상 까치발을 들지 않아도 됐다. “수술 부위만 잘 굳으면 추가 수술이나 치료는 없을 거야. 그동안 수고 많았어. 정은아 이제 졸업하자!” 황 교수의 선언에 정은이는 얼어붙었다. 엄마는 이미 울고 있었다. “정은이에게 수술 기회를 주신 덕분에 이런 날도 오네요!” 

 

오랜만의 등교 날. 우연히 마주친 남학생이 “너 못 본 사이에 허리가 왜 이렇게 펴졌어? 신기해!”라며 호들갑이었다. 선생님들도 정은이의 변화를 금세 알아보았다. “이제 체육 시간에 뛸 수 있겠네!” 정은이는 모두의 축하를 엄마에게 들려주었다. ‘나 지금 무지 행복해!’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엄마는 다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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