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환자 이야기 30년, 끝나지 않은 기도 2025.01.21

 

 

국내 최초. 익숙한 수식어 뒤에는 당사자들의 절절한 이야기가 숨어있다. 
1994년 12월 8일 시한부 선고를 받은 생후 9개월 딸을 수술실로 보낸 어머니와 
뇌사자 기증이 흔치 않던 시기에 돌파구를 찾고자 18시간의 생체 간 적출과 이식을 집도한 의사는 
수술실 안팎에서 피가 마르는 듯한 순간을 이겨내고 있었다. 
국내 최초의 생체 간이식에 성공하며 아버지의 간을 무사히 이식받은 환아는 
어느덧 서른 살 어른으로 성장해 자신의 삶을 둘러싼 ‘최초’의 의미를 알아가고 있다.

 


어머니의 기억 
갓 태어난 지원이가 선천성 담도폐쇄증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카사이 수술’이 필요하다는 진단을 들었지만 수술 말고 다른 치료법이 있을 거라 믿으며 아이와 집으로 돌아왔다. 수술 적기는 이내 지나가고 지원이의 피부와 눈은 노랗다 못해 초록빛을 띠기 시작했다. 아이의 배가 임산부처럼 부풀면서 실핏줄과 배꼽이 튀어나오고 당장이라도 터질 듯했다. 남편이 출근하고 딸과 둘이 남으면 넘치는 애정만큼 두려움에 짓눌렸다. 같은 질병을 앓는 환아들의 평균 생존 기간은 불과 13개월. 아이가 잘못되면 그 죄책감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서울아산병원을 찾았다. 간을 이식받아야 하지만 당시 뇌사자 기증은 흔치 않았다. 그해가 가기 전, 소아청소년전문과 김경모 교수의 전화를 받았다. “생체 간이식이 동물실험에 성공했습니다. 지원이에게 시도해 보죠.” 앞선 사례가 없다고 머뭇댈 여유가 없었다. 곧바로 짐을 싸서 서울로 올라왔다. 남편의 간 일부를 지원이에게 이식하는 수술은 빠르게 진행됐다.  


수술 후 감염 가능성에 대비해 지원이는 격리 입원 생활을 시작했다. 보호자 역할은 쉽지 않았지만 아이의 회복력을 보는 기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피부와 눈의 색이 금세 뽀얗게 안정됐다. 누워만 지내던 지원이가 갑자기 침대 난간을 잡고 일어섰던 날에는 눈을 의심했다. “어머머, 네가 그동안 무지 걷고 싶었구나?” 생명을 지키는 건 어른들의 몫이지만 지원이 스스로도 삶을 꽃 피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병원에서 맞는 첫돌은 의료진의 선물과 축하로 가득했다. 작은 돌상에도 감사한 마음은 차고 넘쳤다. “지원아, 널 다시 태어나게 해준 건 이승규 교수님이고, 널 키워준 건 김경모 교수님이란다!” 
반년간의 입원 생활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조금의 아픔도 스며들지 않도록 집안을 샅샅이 소독했다. 땀이 줄줄 흘렀지만 웃음도 멈추지 않았다. 새하얀 내 아기가 두리번대며 엄마 품을 찾고 있었다. 


 
이승규 교수의 기억 
뇌사 장기기증이 생소하던 1990년대 초, 생체 간이식은 꼭 이뤄야 할 숙제였다. 토요일마다 동물 실험을 거듭했고 1994년 새로 부임한 김경모 교수와 의기투합해 생체 간이식을 준비했다. 모든 준비를 마쳤을 때 지원이를 만났다. 담도가 없어 간 안에 담즙이 고이며 생긴 염증으로 간문맥이 딱딱하고 좁아져 있었다. 혈류가 이탈하는 문제도 있었다. 철저한 수술 계획을 세우고 수술실에 들어갔다. 하지만 수술을 시작하자 지원이에게 그 수술법을 적용하기 어려운 상황임을 알게 됐다. 그 순간, 신의 선물처럼 이제껏 시도된 적 없는 혈관재건 아이디어가 떠오르며 대안을 찾아나갔다. 떨리는 마음으로 새로 연결한 혈관에 혈류를 개통하자, 이식된 창백한 간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18시간에 이르는 대수술이 비로소 성공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수술 후 지원이는 면역억제제에 거부반응을 일으켰다. 이대로라면 간이 금세 망가지고 퇴원도 요원했다. 애가 타서 매일 지원이의 병실에 들렀다. 부작용 없는 약을 외국에서 공수한 뒤에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지원이를 통해 나는 자신감을 얻었고 2, 3호 생체 간이식이 이어졌다. 지금껏 무수한 환자를 수술했지만 ‘처음’이라는 경험은 늘 각별하게 기억됐다. “내가 그때 네 고민을 하도 많이 해서 까맣던 머리가 이렇게 백발이 됐잖니!” 실없는 농담에 지원이는 도리어 나의 건강을 걱정할 만큼 성숙한 어른으로 자랐다. 이제는 “지원 씨”로 점잖게 부르리라 마음먹어도 만나면 “지원아!” 오랜 습관이 튀어나오고 만다. 꼬맹이 때의 표정으로 다가오니 반가운 마음을 나도 어쩔 도리가 없다.  

 

 

지원이의 기억  
배에 커다란 흉터만 남아있을 뿐 기억에도 없는 간이식 꼬리표는 늘 따라다녔다. 매일 12시간 간격으로 면역억제제를 복용하고 면역력이 약해 늘 예민하게 건강을 챙겼다. 지역 병원에선 사소한 치료도 꺼려 매번 대전에서 서울아산병원까지 진료를 받으러 와야 했다. 어릴 땐 학교를 자주 결석해야 하는 게 싫었고, 커서는 회사 휴가의 대부분을 진료 일정에 맞추는 게 억울한 심정이었다.

 
지난해였다. 진료실에 들어서는데 김경모 교수님이 앞서 진료한 환아를 불렀다. “이 누나도 30년 전에 간이식을 받았어. 어때? 지금은 건강하지?” 환아의 눈길에 잠시 당황했지만 언뜻 기대 어린 표정이 읽혔다. ‘나의 건강한 모습이 누군가에게 큰 의미가 될 수 있겠구나!’ 


무심코 흘려 보낸 지난날의 의미들이 새롭게 다가왔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아버지는 뜬금없이 이야기했었다. “네가 초등학교 졸업하는 걸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교복을 처음 입은 날도, 대학 입학식에서도, 취직했을 때도 늘 같은 이야기였다. 아버지는 나보다 더 나의 하루하루를 간절하고 애틋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앨범에 꽂혀있던 김 교수님의 30년 전 편지에는 ‘3가지 소원이 있단다. 지원이가 빨리 예쁜 피부로 돌아오는 것, 무럭무럭 자라서 내가 선물한 옷을 더 이상 못 입게 되는 것, 이 편지를 읽고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건강하게 자라는 것!’ 내일을 장담할 수 없던 나를 두고 사소한 기도부터 시작하고 있었다. 30년 간 아플 때마다 연락하면 약과 진료 일정을 먼저 챙겨주던 정성도 기도의 일부였을 것이다. 나는 누군가의 기도 결과였고, 이제는 누군가의 희망의 근거였다. 오래도록 건강한 모습으로 모두의 기도와 희망에 기쁘게 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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