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환자 이야기 턱걸이 챔피언, 더 높이 오르다 - 두경부암 동호 이야기 2025.07.01

 

일곱 살 소년은 엄마 손에 이끌려 수술대에 올랐다. 입안을 붓게 만든 ‘종양’을 떼는 수술이라고 했다. 
한 번이면 될 줄 알았던 수술은 두 번, 세 번 이어졌다.

“엄마, 얼굴 안에 뭔가 또 자라는 것 같아요”라고 말하면 엄마 얼굴엔 금세 어두운 근심이 드리웠다.

의사에게도 비슷한 표정이 보이기 시작했다. “죄송하지만 저희가 더 이상 해줄 게 없습니다.”

“그럼 우리 동호는 어떡하라고요?” 엄마는 울고, 아빠는 화를 냈다.

 

“이 병원에서도 동호를 치료할 수 있을지 장담은 못 하지만···”이라며 의사가 소개한 곳은 서울아산병원이었다. 

 

 

 

‘끝까지’라는 약속 
3번의 수술을 받고도 커다란 종양이 재발한 아이를 받아줄 곳이 있을까. 부모는 진료실 문 앞까지 안절부절못했다.

 

“끝까지 해봅시다!”

이비인후과 교수의 말에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나을 수 있다는 먼 희망보다 ‘끝까지’라는 책임감이 훨씬 든든하게 들렸다. 진료실을 나설 때까지 감사하다는 인사를 거듭했다. 신경이 많이 연결된 부위여서 까다로운 수술이 될 거라고 했지만 수술 후 종양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마음 놓고 보낸 1년. 종양은 어느 순간 빠르게 자라기 시작했다. 지방육종의 가능성을 두고 수술과 항암, 방사선 치료를 병행하기로 했다. 소아청소년종양혈액과 고경남 교수는 작은 표정까지 읽으려는 듯 소년과 눈을 맞췄고 많은 이야기를 건넸다. “괜찮아, 잘될 거야.”

 

틀어진 얼굴을 치료하기 위해 만난 성형외과 최종우 교수는 “종양 치료만 잘 받고 오면 내가 얼굴은 잘 만들어 줄게!”라며 호탕하게 약속했다. 의료진을 만나면 엉킨 실타래를 살살 풀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암 환자의 삶은 
“상추에 삼겹살을 싸서 크게 한 입 먹어보고 싶다~” 남들과 다르다는 서글픔은 늘 사소한 데서 시작됐다. 종양이 얼굴 뼈와 치아를 밀어내면서 턱이 틀어지고 치아 5개가 아예 나오지 않았다. 숟가락 하나도 입에 넣기 어려워 모든 음식을 다져 먹어야 했다. 소년은 ‘육즙 터지는 맛’마저 궁금했다. 오른쪽 안면이 마비되면서 음식을 곧잘 흘리고 뜬금없이 눈물이 새어 나오자 남들의 시선이 의식되어, 외출과 외식은 자연스레 줄었다.

 

치아 교정과 양악 수술을 시작하며 출석 일수를 채우기 어려워져 중학교도 자퇴했다. 몇 번 입지 못한 새 교복은 엄마의 눈물 버튼이 됐다. 그때마다 동호가 건강했다면 치맛바람 센 엄마가 됐을 거라며 엄마는 애써 웃었다. “너는 영특하니까 틈틈이 검정고시 준비하면 친구들이랑 같이 고등학교에 갈 수 있어.”

 

아빠는 일터에서 종종 전화 걸어 “아들, 아빠가 많이 사랑해!”하고는 “…인마, 너도 대답 좀 해주라!”라며 대답을 재촉했다. 끝없이 들어가는 치료비에 숨이 턱턱 막히면서도 “아빠 사랑해요” 그 한마디면 족했다. 


때로 무너지는 날도 있어서 
‘왜 이렇게 아플까. 왜 나만 아플까?’

수술은 수십 번을 받아도 때마다 두려웠다. 항암치료가 시작되자 계속 토하고 어지러웠다. 코끝을 따라다니는 약 냄새가 앞으로의 운명인 것만 같았다. ‘치료의 끝이 없다면 삶을 끝내는 게 쉬울지 몰라. 나만 없어지면 가족들도 행복할 테고.’ 스치는 생각이 마음에 오래 머문 날 소년은 아파트 옥상에 올랐다.

 

마지막이라 생각한 순간, 소년의 양팔을 엄마가 꽉 잡았다. 아들이 짊어진 무게가 오롯이 엄마의 손 끝에 전해졌다. ‘이쯤에서 아이를 놓아주고 나도 따라갈까. 내가 더 늙으면 아이 혼자 감당해야 할 텐데….’ 그렇지만 아들을 더 꽉 쥐었다. “동호야, 네 잘못이 아니야. 네가 사라지면 우리 가족은 더 불행해질 거야.” 소년의 팔에는 엄마가 붙잡았던 자국이 깊게 남았다. 혼자만의 삶이 아니라는 걸 기억하게 만드는, 죽을힘을 다해 살아보자는 엄마의 부탁이 몸에 새겨진 것이다.     

  

더 높이 오르기로 했습니다 
“아빠, 방문에 철봉 좀 달아주세요.” 소년은 질병과 함께 살아갈 방법을 찾아 나섰다. 매일 집에서 턱걸이를 연습하면서 무언가에 열중하는 것만으로 기분이 전환됐다. 실력이 늘수록 자신감도 생겼다. 고등학교와 대학교도 무난히 진학했다. 항암과 약물 치료는 더 이상 필요 없었고 종양도 예전처럼 빠르고 크게 진행되진 않았다.

 

다만 이비인후과 최승호, 권민수 교수에게 매년 종양제거술을 받았다. 그때마다 회복 기간이 필요했고 열심히 쌓은 체력과 턱걸이 실력은 금세 허물어졌다. 허탈하고 아쉬운 마음을 이겨내며 할 수 있을 때 열심히, 포기하지 않는 마음의 근력을 키웠다. 매 순간의 소중함은 커졌다. 니체의 말처럼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들 뿐이었다.

 

수술받고 퇴원하는 날, 낯선 번호로 계속 전화가 왔다. 얼굴에 붕대를 감고 있어서 엄마가 대신 전화를 받았다.

 

“김동호 군이 턱걸이 대회에서 1등을 했습니다. 축하합니다!”

수술 받기 전날, 온라인 턱걸이 대회에 영상을 찍어 보낸 것의 결과였다. 건강한 참가자들을 모두 제쳤다는 것이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가족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장하다, 우리 아들!”   

삶의 감사를 짊어지고서 
지난 연말 공중파 TV에 턱걸이 달인으로 소개됐다. 1분에 70여 개. 건장한 체구와 단련된 체력을 뽐내는 이들도 감히 도전하기 어려운 기록이었다. 턱걸이 영상을 올리던 개인 유튜브 채널에는 멋있다, 대단하다는 응원부터 많은 위로와 도전을 받았다는 환우들의 따스한 댓글이 가득했다. 소문을 듣고 영상을 찾아봤다는 고경남 교수는 엄지를 치켜세웠다.

 

“동호야, 네가 언젠가부터 어깨가 넓어진다 싶었는데 챔피언까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 진짜 존경스럽다!”

“여러 교수님이 저를 끝까지 책임지겠다며 살려주신 덕분이에요. 제 목숨이 그만큼 가치 있다는 것도 알게 됐고요. 이젠 다른 환자들에게 긍정적인 메시지를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래 주면 내가 더 고맙지! 선생님은 동호가 다 나을 수 있을 거라고 믿어!”  


남의 시선을 두려워하던 소년은 자신의 작은 영향력을 가치 있게 사용하고 싶은 청년으로 성장해 있었다. 부모님의 눈물, 의료진의 책임감, 다른 환자들의 희망… 그것들을 짊어지고 스물세 살 김동호는 매일 철봉에 매달린다.

 

중력을 거슬러, 더 건강한 도전을 준비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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