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환자 이야기 매일의 고비에도 아이는 자란다 - 생후 1개월 소아암 환아 이야기 2025.08.25

 

“정원이 자랑을 좀 해도 될까요?

생후 1개월 때 신경모세포종(소아암) 4기로 우리 병원에 전원한 친구인데요. 당시 종양이 간에 전이돼 생사가 오가는 상황이었어요.

오자마자 항암 치료를 진행하고 중환자실에서 사투를 벌였는데, 그런 정원이가 무사히 퇴원해선 돌잔치도 했대요.

정말 기쁜 소식이죠. 하하.”

 

소아청소년종양혈액과 고경남 교수는 정원이의 소식에 활짝 웃었다. 어제의 아픔을 잊은 채 쑥쑥 자라는 아이들이 그렇게도, 반갑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정원이는 우리 부부가 5년간 애타게 기다려 얻은 아이입니다. 돌아보면 기다린 마음만 컸지, 부모가 어떻게 되는 건지, 아이는 어떻게 자라는지 하나도 몰랐던 것 같아요. 아이의 배꼽이 조금 튀어나온 걸 처음 보고서 우리는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겼어요. 검진차 병원에 갔을 때 큰 병원에 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집 근처 대학병원 응급실로 남편과 아이를 보내고 산부인과 진료가 있던 저는 뒤쫓아 가기로 했죠. 그런데 아이 아빠에게서 언제 오냐는 연락이 끊임없이 오더군요. 교수님도 아시다시피, 정원이가 걸린 병 때문이었어요. 처음엔 잘못 들은 줄만 알았어요. 세상에 나온 지 34일 만에 암 선고라뇨.   


진료실을 나오는데 제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이 뭔 줄 아세요? 젖몸살이 났다고 이틀 전부터 정원이를 안아주지 못했다는 거예요. 대성통곡을 하면서 아이를 계속 안고 있었어요. 남편에게도 주지 않고요. 중환자실에 아이를 놓고 나올 땐 현실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어요. 4일째 되던 날에 서울아산병원으로 전원 결정이 났고, 살짝 볼록했던 정원이의 배는 그 사이에 터질 듯 부풀어 있었어요. 구급차를 타고 가는 내내 의정 갈등이 한창인 때라 정말 불안했어요. ‘우리 아이를 받아줄 의료진이 없으면 어떡하지?’  

 

* 
다행히 우리는 교수님을 만날 수 있었고 바로 항암 치료가 진행됐어요. 아이 몸에는 투석기와 인공호흡기 등이 가득 달렸죠. 매일 아침 30분. 아이를 만나기 위해 우리는 인천에서 2시간을 달려왔어요. 아이 상태가 나빠져 빨리 와야 할 것 같다는 연락도 여러 번 받았죠. 02로 시작하는 전화만 오면 심장이 덜컹 내려앉아 숨도 못 쉬겠더라고요. 급기야 이게 꿈은 아닐까, 악몽에서 깨어나면 옆에 아기가 누워있는 것 아닐까 착각에 빠지기도 했어요. “여보, 사람이 이렇게 정신이 나가는 걸까?” 우리 부부는 서로의 마음까지 챙겨야 했어요. 혼자 몰래 울고 있는 건 아닌지, 끊었던 담배를 다시 손대는 건 아닌지 그 모든 신호에 노심초사하면서요. “우리 아가가 천사라서 빨리 데려가려고 하나 봐.” 마음의 준비도 여러 번 했답니다.   


정상 세포와 암세포가 구분 안 될 정도로 정원이의 간이 좋지 않다고 했어요. 피부색도 달라지고 보드라운 말랑거림도 사라졌어요. 온몸에 발진이 올라왔을 때는 의료진까지 놀라게 했죠. 항암치료 효과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자 중단하고 조금 기다려보기로 했어요. 어려운 상황을 설명할 때마다 교수님은 그래도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해 주셨어요. 모두가 이렇게 애쓰는데 매일 고비를 만나니까 울음을 멈출 수 없더라고요. 어느 날 아이가 움직이지 않도록 얇은 붕대로 침대에 손을 결박시킨 걸 봤어요. 작은 손에 쥐여준 거즈를 아이가 꼭 쥐고 있었어요. 그걸 본 순간 저 아이도 살려고 발버둥 치며 애쓰고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장한 내 새끼. 우리가 무너지면 안 되지’하고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 모든 신에게 기도했어요. 종교대통합(?)이라는 그 어려운 걸 제가 해냈습니다. ‘인공호흡기만 떼도 소원이 없겠다’는 입버릇이 현실로 이뤄지고, 종양 크기도 점점 작아지고 있었어요.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가게 됐을 때 의료진분들은 못내 미안해하셨죠. 더 위중한 환자가 있어서 그나마 상태가 나은 정원이가 병실로 가게 된 상황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정원이의 상태가 가장 좋다는 한 마디에 종일 기분이 좋았어요. 꼭 1등 했다는 말처럼 우쭐해지고요. 부모가 되면 어쩔 수 없나 봅니다.    

 


병실에선 다시는 아이를 놓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늘 안고 있었어요. 화장실도 제때 못 가고, 팔베개를 해줘야 잠드는 습관을 들였지만 마음껏 안고 싶은 제 욕심은 원 없이 이뤘습니다. 금식부터 시작해 5ml씩 분유를 늘려가는데 그마저도 속을 게울 때가 많았어요. 다시 신생아가 된 것처럼 2시간 간격으로 먹이는데, 6인실에선 젖꼭지 소독하랴 시간 맞춰 먹이랴 녹록지 않더라고요. 어느 날 한 간호사 선생님이 퇴근 후 시간이 남는다면서 병실을 찾아 주셨어요. 정원이를 보고 있을 테니 얼른 식사하고 숨 좀 돌리고 오라며 제 등을 떠미셨죠. 어리둥절한 상태로 병실을 나선 순간, 정원이 엄마라는 역할에서 빠져나와 저 자신을 잠시 돌아볼 수 있었어요. 맘속에선 뜨거운 눈물을 흘린 것 같아요. 교수님은 일요일에도 정원이를 보러 오셨죠. “교수님은 도대체 언제 쉬세요?” 물었던 것 기억하세요? 얼굴에 피로가 가득한데도 따뜻한 말 한마디 잊는 법이 없으셨어요. 아이는 온 동네가 키운다더니 정원이는 온 병동 사람들이 키웠네요. 힘든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 미화되기 마련이지만, 그때의 고마움은 다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작년 6월 21일 정원이는 무사히 퇴원했습니다. 암이 완전히 없어진 건 아니지만 그래도 가정에서 저희와 지내며 첫돌도 맞이했고요. 요즘 시대에 돌이 유난 떨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 왔지만 정원이는 워낙 힘겨운 한 해를 보냈기에 100여 명을 초대했어요. 솔직히 저희 결혼식보다 더 잔치 같았어요. 아이를 키우며 감성이 무럭무럭 자란 남편은 편지를 낭독하며 참석한 모두를 울리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기쁜 눈물이어서 다행이었어요! 돌상에서 실을 잡게 하려고 무진 애를 썼는데 정원이는 기어코 마이크를 잡더군요. 너무 화려한 마이크를 준비한 탓이라며 아쉬워 했는데, 문화센터에 가면 무대 중앙에서 마이크를 잡는 걸 보니 정원이가 선택한 운명인가 봅니다. 정원이의 수많은 선택과 꿈들을 지켜보게 될 앞으로가 조금 떨리고 기대도 됩니다. 또 얼마나 우리를 놀라게 할까요.  


우리 가족의 힘든 순간을 함께한 사람이 교수님이어서 참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도 교수님은 진료실에서 저희 같은 가정에 단단한 행복을 심어주고자 애쓰고 계시겠죠? 의료진 여러분의 건강과 행복은 저희가 기도해 드릴게요. 그럼 더 건강한 모습으로 진료실에서 뵙겠습니다.      

보다 건강한 콘텐츠 제작을 위해 이 콘텐츠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을 말씀해 주세요.

뒤로가기

서울아산병원 뉴스룸

개인정보처리방침 | 뉴스룸 운영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