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환자 이야기 패밀리맨 - 30대 가장, 비강암 환자 이야기 2025.11.21
 

30대는 일에 집중해야 할 때라 여겼다. 매일 가속 페달을 밟았다.

그러나 성공보다 먼저 찾아온 건 두개저 후각신경모세포종이었다. 그것도 아무 예보 없이 덮친 재난물처럼 말이다.

어린 두 딸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생겼고, 뇌기저부까지 침범한 종양을 무사히 제거하지 못하면 숨길 수도 없는 변화가 찾아올 터였다.


과연 이 순간이 인생에 어떤 자국을 남기게 될까. 주위의 정적은 무거웠고 생각은 요란했다.

당황스러운 진단 

어느 날 잠에서 깨자마자 코피가 쏟아졌다. ‘어서 출근해야 하는데….’ 까닭 모를 코피보다 회사 지각이 더 걱정이었다. 1시간이 넘도록 피가 멈추지 않자 부랴부랴 휴가를 냈다. 동네 이비인후과에선 물혹 때문이라고 했다. 하루 입원해 수술하면 될 일이라는데 회사 일이 바빠 그 하루의 휴가마저 부담스러웠다. 수술 외의 대책을 물었지만 별수 없었다. 동네 병원에서 안내한 대로 서울아산병원에 방문했다.   

 

가져간 CT 내용을 보고 이비인후과 유명상 교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암인 것 같은데….” 가족력도 없고 아직 30대에 불과해 얼토당토않은 소리처럼 들렸다. ‘차라리 암에 걸리면 회사라도 좀 쉴 수 있겠네…’라는 철없는 생각이 들었다. 1차 조직 검사에서 혈관종 소견이 나왔다. 그런데 유 교수는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병변이 크니 입원한 후에 안쪽 조직으로 재검사를 해보자고 했다. ‘대뜸 암이라고 해서 사람 불안하게 만들더니, 믿을만한 분이 맞나?’ 병실에 있으니 자신만만하던 마음에도 불안이 찾아왔다. 밤새 외국의 의료 자료까지 샅샅이 뒤졌다. 병동 복도에서 마주친 유 교수에게 “그래도 제가 암은 아니겠죠?”라고 물었다.

 

“중요한 건 정확한 진단과 그에 따른 치료입니다. 그것만 잘 따르시면 돼요.” 교과서 같은 한마디에 마음가짐이 조금 달라졌다. 질병에 관한 정보를 더 이상 찾지 않았다.

 

최종 진단 결과는 유 교수의 예상대로 비강암이었다. 그것도 매우 희귀하고 치료가 어렵다는 두개저 후각신경모세포종이었다. 조기 진단과 고난도 수술, 다학제적 치료가 성패를 좌우한다고 했다. 유 교수는 무조건 수술을 빨리 해야 한다며 수술 일정까지 신경 써주었다. 암에 대한 직관으로 정확한 진단을 이끌어내고 치료 과정을 책임지는 유 교수를 만난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결국 사람이 하는 일 

항암 치료가 시작됐다. 물만 먹어도 토할 듯해 병원에 다녀오면 2~3일은 내내 잠만 잤다.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하자 거울 속엔 내가 없고 웬 낯선 암 환자가 보였다. 4.6cm의 종양이면 새끼손가락만 하려나 싶다가도 콧속 어딘가에 들어 있기엔 너무 큰 사이즈 같았다. 문제는 종양이 눈이나 뇌로 침범했는지 여부였다. 사실 암 진단에 동요되지 않던 마음이 뇌로 침범하면 치료가 어려울 수 있다는 이야기에 덜컥 겁이 났다. 검사 결과를 듣고 집에 돌아왔을 때 아내는 말없이 나를 안아주었다. 아내의 품에서 나는 조금 울었다. “아직 모르는 일이니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 보자.” 아내는 침착했다. 가족이 내 뒤에 버티고 있으니 어떤 결과에도 떠내려가지 않을 자신감이 충전됐다. MRI 검사 결과, 다행히 종양은 경계선에 걸쳐 있었다.  

 

신경외과 홍창기 교수의 집도로 수술이 시작됐다. 오전 9시에 수술실에 들어가 눈을 떠보니 10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경계에 위치해 넉넉하게 제거할 순 없어도 수술 목표대로 잘 마쳤다고 했다. 내가 잠든 사이에 나의 위기는 지나가고 있었다.   

 

전신마취 이후에 스스로 소변을 볼 수 없어 소변줄을 삽입했다. 매일 새벽 찾아와 이를 처리해 주는 주치의가 어쩐지 고되어 보였다. 늘 일에 파묻혀 지내던 나는 그 마음을 잘 안다는 듯이, 새벽의 기운을 빌려 말을 걸었다. “서울아산병원 의사가 될 정도면 공부도 잘하셨을 텐데 더 편한 길로 가시지….” “세상에 편한 일이 있을까요? 뭐든 열심히 해야죠.” 생색도, 짜증도 담겨있지 않은 담담한 태도였다. 신기하게도 나는 그 순간에 일의 가치와 태도를 한 수 배운 기분이었다.

 

 

건강을 잃고서 보이는 것들 

입원 기간에 보조 침대에서 쪼그려 잠든 고령의 어머니를 보고 있으면, 새벽마다 젊은 의사에 의지해 소변을 처리할 때면, 어쩔 수 없이 내 처지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왜 이런 일이 닥친 걸까 생각하면 끝이 없었다. 회복한 뒤에 제일 하고 싶은 일을 떠올려 보기로 했다. 그런데 다른 건 떠오르지 않았다. 오직 유치원에 간 둘째 아이를 마중 나가 손잡고 걷고 싶어졌다. 10m도 채 안 되는 거리일 뿐인데. ‘바라는 게 고작 이거라고?’ 스스로 놀라면서도 뜬눈으로 밤을 지새울 만큼 가슴이 설렜다. 나에게 진짜 행복이 뭔지 분명해졌다. 이제까지 밤늦게 퇴근해 돌아오면 방문을 걸어 잠그는 아빠였다. 똑똑. 똑똑똑. “아빠~” 종일 나를 기다리던 아이들이 같이 놀자며 문을 두드리던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수술하러 오는 길에도 첫째 아이는 내가 탄 택시를 따라 한참 달려왔다. 삭발한 아빠 모습에 “아빠 무슨 일 있어? 나한테만 얘기해줘”라고 속삭였던 걸 보면 이상한 조짐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입원하던 날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택시 창문을 내리고 “아빠 금방 다녀올게!” 손을 흔들며 아이를 안심시킬 것이다. 아내에게는 새로 산 냉장고가 집에 잘 도착했는지, 마음에 드는지도 어서 물어보고 싶었다. 수술 잘 마치고 왔으니 맛있는 음식 좀 해달라고 부탁하면서 말이다. 

 

 

행복은 곁에 있었다 

별다른 치료 부작용은 없었다. 후각을 잃은 것 빼고는. 치료 내내 그렇게 마시고 싶던 커피가 맹물처럼 느껴졌을 때 잠시 속상했지만 금방 익숙해졌다. 어차피 비염 때문에 후각이 무디기도 했다. 그런데 수술 후 가족과 괌에 놀러 갔을 때 아이가 길에서 주워 준 꽃 냄새, 지나가던 사람의 향수 냄새, 엘리베이터 안 서양인 특유의 냄새를 맡은 듯했다. 후각이 돌아온 걸까 내심 기대했는데 한국에 돌아오니 냄새는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너무 행복해서 환상을 느낀 걸까?’

 

만나는 친구마다 넌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 서울아산병원을 만난 것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전적으로 동감한다. 꼭 성공하지 않더라도 가족과 함께인 건강한 삶 그 자체가 의미 있다는 걸 더 늦지 않게 배운 것도 운이 좋았다. 암이 재발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유 교수에게 물은 적이 있다. “재미있게 사세요. 그거면 충분합니다.”

그 말을 지킨 지 3년. 2025년 11월이면 완치까지의 기다림도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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