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활용 일러스트)
우리 병원에서 내가 가장 아끼는 곳, ‘신관 대나무숲’
누가 이름 붙였는지, 이곳은 어느새 우리 모두의 다정한 휴식처가 되었다.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푸른 대나무의 자태도 일품이지만, 바람이 스칠 때마다 들려오는 대나무 잎 풍경(風磬) 소리는 유난히 오래 가슴에 남는다. 복잡한 생각을 잠재우기도 하고 흩어진 의지를 가만히 모아주기도 하며, 잔잔하던 마음에 잔물결을 일으키기도 한다. 누구에게도 꺼내지 못한 이야기조차 이곳에 서 있으면 이미 털어놓은 듯 마음이 가벼워지곤 했다. 내게 대나무숲은 잠시 휴식의 세계로 건너가는 길목이었다.
어둠이 내려앉으면 금빛 조명이 길을 만들고, 그 위로 시간도 잠시 숨을 고르는 곳. 삶의 위기 앞에 선 환자와 보호자에게도 사계절 푸르고 흔들리되 쓰러지지 않는 대나무의 모습은 말없이 건네는 위로였으리라.
그러나 코로나19 확진자를 전원 받던 지난 2년여의 시간 동안 이곳은 낭만과는 거리가 먼 치열한 삶의 통로였다.
전국 각지에서 걸려오는 전원 문의는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중앙대책본부, 중앙사고수습본부, 서울시청 등 다양한 소속의 병상 배정 담당자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잠깐의 샤워 시간에도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다태아 임산부, 소아 환자, 중증 기저질환자까지.한시가 급한 이들의 절박함이 수화기를 타고 전해졌다. 휴대폰이 울릴 때마다 들려오는 목소리는 귓가를 파고들었고, 그 긴박함 속에서 쌓여가던 피로는 오히려 잊히곤 했다. 한 통의 전화를 놓치는 순간, 꺼져버릴지도 모를 생명이 수화기 너머에 있다는 생각에 정신을 놓을 수 없었다.
전원 의뢰 전화를 받는 즉시 역학조사서를 펼쳤다. 보이지 않는 환자 상태를 문장 사이에서 빠르고 정확히 읽어내야 했다. 중환자실 입실 여부와 병상 가용 여부 등 전반적인 상황을 파악해 감염관리실장님과 상의한 뒤 전원 여부를 최종 결정했다. 환자를 직접 보지 못한 채 중증도와 필요한 치료 수준을 판단해야 한다는 부담은 늘 어깨를 눌렀다. 자칫 판단이 어긋나면 환자를 위험에 빠뜨릴 수도, 동료들에게는 불필요한 부담을 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결정을 미룰 수도 없었다. 신중함과 신속함 사이, 언제나 그 아슬아슬한 균형 위에 서 있었다.
이송이 결정되면 거대한 톱니바퀴가 맞물리듯 전 부서가 움직였다. 진료지원실, 중환자실과 확진자 병동, 음압수술실과 분만장, 원무팀, 보안관리팀, 총무팀, 그리고 보호구를 입고 환자를 이송하는 의료진까지. 구급차 도착 시간에 맞춰 정확히 환자를 인계하는 것, 그것이 불필요한 통제와 동료들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내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병상 배정 담당 선생님, 도착하시면 신관 대나무숲으로 오시면 됩니다.”
“병원에… 대나무숲이 있어요?”
전국 각지에서 확진 산모와 아이들, 위태로운 어르신들을 모셔오던 우리는 보호구 너머로 목소리조차 또렷이 전하지 못한 채 그 시간을 함께 버텨냈다. 동선을 지키던 보안요원도, 남겨진 바이러스를 묵묵히 정리하던 미화원도, 위험한 길을 쉼 없이 달려온 이송 요원도, 모두가 같은 이름의 동료였다. ‘환자’라는 목표 앞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하나가 되었다.
긴 유행이 끝나고 가족보다 더 자주 연락을 주고받던 병상 배정 선생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한 번도 얼굴을 본 적 없지만 목소리와 메시지로 서로를 위로하며 언젠가 만나자고 했던 약속을 지키자는 연락이었다.
“혹시… 병상 배정 선생님 맞으세요?”
랜선 밖 첫 만남의 어색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를 금세 알아볼 수 있었다. 긴 시간을 함께 건너온 사람들이라는 것을. 서로를 위로하며 버텨낸 감염병 유행의 시간은 어느새 추억의 자리로 옮겨가고 있었다.
“이곳이 그 신관 대나무숲이군요.”
“‘대나무숲으로 오세요’ 그 말을 건넬 때마다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어요. 마치 시원한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것처럼요.”
고요했던 날의 대나무숲도, 치열했던 날의 대나무숲도 결국 사람들로 인해 빛이 났다.
부드러운 햇살이 스며든 신관 대나무숲을 바라본다. 그곳은 한때 휴식처였고, 또 한때는 우리가 끝내 버텨낸 길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을 말없이 함께 견뎌준 그곳을 향해 조용히 말을 건넨다.
그 자리에 있어줘서 고마웠다고

▲서울아산병원 신관 대나무숲

아카데미운영팀
홍민지 차장
서울아산병원 중환자실과 감염관리실, 국제진료센터를 거쳐 현재 아카데미운영팀에서 전 직원의 성장을 돕는 교육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25년, 간호사로 살아온 시간 동안 의료현장에서 마주한 수많은 장면들 속에 스며든 의료인으로서의 고민과 생각을 '진심'의 온도로 잔잔히 나누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