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사는 박정미(여, 61) 씨는 진전 없는 간암 치료를 이어가고 있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던 진료 날이었다. 주치의 옆에는 처음 보는 한국 남자가 있었다.
“서울아산병원에서 온 내 친구, 닥터 유입니다.” UCLA에서 안식년을 보내고 있다는 종양내과 유창훈 교수였다.
점심 약속으로 만났다가 진료실이 그리워 따라왔다는 그는 “혹시 한국어로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거나 추가 소견이 궁금하시면 연락 주세요”라며 연락처를 건넸다.
정미 씨는 다정한 호의에 감사하면서도 그저 스쳐 가는 인연이라 여겼다.

정해진 운명을 거슬러
정미 씨는 2023년 4월 말 간세포암을 진단받았다. 가족력인 B형간염으로 이미 아버지와 오빠를 잃었기에 3개월마다 검진을 받아왔지만, 암은 그 틈을 타 잔인하게 피어났다. 미국 병원의 치료 일정을 기다리기엔 너무나 빠르고 공격적인 진행 속도였다. 지인의 도움으로 한국의 대형 병원에서 간신히 수술을 받았지만 정미 씨의 불안은 끝나지 않았다. 이어진 추적 검사에서 폐 전이를 발견했다. 이러다간 미국에 있는 자녀들에게 마지막 인사조차 제대로 전하지 못할 것 같았다. 정미 씨는 신변을 정리하기 위해 서둘러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후 시도하는 항암제들은 아무런 효과 없이 부작용만 남겼다. 양쪽 폐에 다발성으로 퍼진 암으로 수술이나 방사선 치료는 이미 불가능했다. 더 이상 쓸 수 있는 약이 없다는 주치의의 절망적인 선언을 들은 날, 정미 씨는 문득 몇 개월 전 진료실에서 만난 유 교수를 떠올렸다. 용기를 내어 연락했다. 이미 한국으로 돌아간 유 부교수는 마침 새로운 임상시험 약물이 나왔다며 필요한 서류를 알려주었다. 무언가 시도해 볼 수 있다는 일말의 희망이 정미 씨를 다시 인천행 비행기에 오르게 했다. 최종 목적지는 서울아산병원이었다.
슬픔의 자리에 돋아난 신뢰
유창훈. 어쩐지 낯익은 이름은 그동안 환우 카페에서 몇 번 본 걸 거라 여겼다. 그런데 유 교수를 만난 이야기에 서울의 가족들은 화들짝 놀랐다. 그는 몇 년 전 세상을 떠난 오빠의 담당의였던 것이다. 인연은 이렇게도 닿았다. 가족들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준 유 교수에게 여전히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정미 씨가 진료를 받으며 오빠 이야기를 조심스레 꺼냈을 때 그 많은 환자 이름을 다 기억하기 어렵다던 유 교수는 “그 환자분은 기억해요!”라고 말했다. 항암 치료로 어렵사리 수술 가능한 상태까지 만들었지만 수술을 앞두고 갑작스럽게 악화되어 떠나보냈던 안타까움이 가슴에 남아있다고 했다. 떠난 오빠를 기억하는 사람이 가족 외에 또 한 명 있다는 것만으로 정미 씨에겐 왠지 모를 위로가 됐다. 그리고 가족의 비극을 끝내고 싶은 유 교수의 마음은 치료 과정 내내 전해졌다.
정미 씨는 소멸해 가는 삶을 끊임없이 자각하거나 움츠러들지 않았다. 암이 기관지로 침범하지 않은 것만도 감사할 뿐이었다. 이민 생활로 그동안 멀리 떨어져 지내던 어머니와 형제, 친구들 곁에서 남은 삶을 나눌 시간이 주어진 것도 감사했다. 사실 어머니에게는 투병 사실을 숨기고 싶었다. 같은 질병으로 남편과 아들을 잃은 어머니는 딸에게까지 B형 간염을 물려주었다는 죄책감에 무너질 게 뻔했기 때문이다. 정미 씨가 암을 치료하러 한국에 들어왔을 때 어머니는 “내가 오래 살아서 이런 일을 다 겪는구나”라며 절망했다. “엄마, 나는 진짜 괜찮아요. 엄마가 나를 위해 기도해 주면 그 기도가 벽돌처럼 단단하게 쌓일 거야….” 여든여덟의 노모는 딸마저 잃을 수 없다는 간절함으로 아침에 눈을 뜨면 기도로 하루를 시작했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에 정미 씨도 투병 의지를 다졌다. 암이 자신에게 찾아온 이유 같은 건 궁금하지 않았다.
멈춰버린 임상시험
다행히 세포 조직 분석 결과가 임상시험 참여 조건에 부합했다. 그러나 새로운 치료를 시작한다는 기대감은 오래 가지 못했다. 첫 투약 후 혈압이 곤두박질치며 복수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집중치료실에서 밤새 모니터링이 이어졌다. 심각한 상황이 이어지며 병원에선 가족들을 불렀다. 밤새 언니와 함께했다. 잠시 미국 출장 중이던 유 교수는 계속 전화로 정미 씨의 상황을 확인했다. 제약사에선 다급히 투약 중단을 결정했다. 되돌릴 방법도, 다른 시도도 남아있지 않은 이 상황이 아쉽고 허탈했다. 약을 훔쳐서라도 끝까지 가보고 싶은 정미 씨에게 유 교수 역시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제안을 내놨다. “미국에서 이미 실패했던 면역항암제를 다시 써보면 어떨까요?” 임상 약이 이토록 격렬하게 반응했다는 건 몸 안의 면역 세포들이 깨어나고 있다는 신호일 수 있다는 논리였다. 이전에 면역력이 바닥나 듣지 않던 약이 지금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보통 한 번 실패한 약은 다시 쓰지 않는 걸로 알고 있던 정미 씨는 의아했다. 미국의 여러 병원에서도 포기한 환자를 끝까지 지키려는 유 교수의 의지가 먼저 보였다. 무엇이든 믿고 가보기로 했다. 처방전을 본 간호사는 “이런 처방은 처음 보는 것 같아요”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만큼 전례 없는, 과감하고 간절한 시도였다.
숫자가 증명한 기적
2024년 10월 22일 간암 경과를 관찰하는 AFP 수치는 8만 3,000ng/mL, 피브카 투 수치는 16만 4,000mAU/mL이었다. 이중 면역항암요법 주사를 맞고 3주 뒤 검사에선 각각 1만 1,000ng/mL, 18mAU/mL까지 떨어졌다. 단숨에 정상 수치 경계에 도달한 것이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수치 앞에서 정미 씨는 모니터 대신 유 교수의 얼굴을 보았다. 세상 그 누구보다 기뻐하는 표정이었다. 수많은 환자 중 단 한 명의 결과일 뿐일 텐데, 그동안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해 왔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순간을 정미 씨는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빠르게 치료 종결을 향해 갔다.
정미 씨의 CT 사진에는 암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다. 형체만 있을 뿐 이미 괴멸한 세포라고 했다. 암이 지나간 몸 안에, 가족력을 피할 수 없을 거라 믿었던 마음에 새로운 계획과 다짐이 채워지고 있었다. 남은 생은 다른 누군가를 위한 시간으로 채우겠다는 마음이었다. 자녀들이 기다리는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한동안 유언장을 꺼낼 일은 없을 거라는 확신도 함께였다. 정미 씨의 운명은 그렇게 새로운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약이 나를 고친 걸까요? 서울아산병원의 의사 한 사람이 환자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기적인 것 같아요. 나조차 믿기 힘든 기적의 주인공이 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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