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환자 이야기 간절한 꿈 2022.10.05

 

52년을 살면서 아주 많은 꿈을 꿨다. 좋은 배우자, 좋은 집, 자녀의 성공처럼 누구나 꾸는 꿈도 있고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꿈도 있었다. 언제나 꿈을 가졌어도 그렇게 간절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 사실을 폐암 4기 환자가 되고서야 알았다. 아들의 결혼식까지는 살고 싶다는, 매 순간 떠올릴 만큼 간절한 진짜 꿈이 하나 생겼다.

 

창피하고 두려운

2011년 동네 병원에서 받은 건강검진에서 “폐에 뭔가 하얀 게 보인다”라는 말을 들었다. 무슨 소리인지 금방 알아채지 못했다. 검사를 차일피일 미루다가 이듬해 천안의 한 대학병원에서 폐암 진단을 받았다. “저는 담배도 안 피우는데요?” 주변에 암 환자가 없어 암에 대한 상식이 전혀 없던 때였다. 몰래 흡연하다가 폐암에 걸렸다는 오해를 살까 봐 창피하기만 했다. 게다가 마흔두 살은 암에 걸리기에 너무 젊은 나이 같았다. 남편의 긴 한숨이 상황의 심각성을 알려주었다. 군대 간 큰아들과 고등학생인 작은 아들에게는 굳이 이야기하지 않기로 했다. 자연스럽게 알게 될 테니까.

서울아산병원에 혼자 올라와 수술을 받았다. 수술을 잘 마쳤다는 희소식과 임파선으로 전이된 걸 발견했다는 비보를 함께 들었다.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직장도 그만두었다. 쉬면서 몸에 좋다는 식이요법이나 온갖 한방 치료 등을 시도했다. 그러나 2년 후 암이 재발하면서 모든 노력이 부질없게 느껴졌다.

 

정답 없는 투병 생활

항암 주사를 맞으면 2주일 내내 토했다. 움직일 기력도 없었다. 조금 진정되면 뭐라도 먹어야 산다는 생각에 닥치는 대로 입에 넣었다. 그러면 또 주사 맞는 날이 찾아왔다. 이 생활을 4개월째 반복하니 지옥이 따로 없었다. 이제 그만하고 싶다는 말을 연습하며 서울로 올라왔다. 필요하면 교수님께 엄포도 놓을 작정이었다. 그런데 진료실에서 만난 종양내과 최창민 교수님이 먼저 말을 꺼냈다. 약을 바꿔보자고. ‘교수님도 나에 대한 고민이 많으셨구나!’ 약을 바꾸자 머리카락이 나고 구토도 멈췄다. 하루를 살건, 1년을 살건 악착같이 먹고 움직이기로 했다. 텃밭을 가꾸며 시간을 보내니 조금 살 것도 같았다.

1년이 채 안 돼 지독한 기침이 나기 시작했다. 피도 섞여 나왔다. 뭔가 심상치 않았지만 두 달 뒤 정기 검사로 교수님을 만날 때까지는 참아 보기로 했다.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암세포가 폐의 길목을 덮어서 까딱하면 숨을 못 쉬고 죽을 수 있는 위급한 상황까지 온 것이다. 스텐트 시술과 방사선 치료, 면역 항암제 치료가 이어졌다. 하지만 유지 치료에 불과할 뿐 곳곳에 퍼진 암은 손쓰기 힘든 상황이었다. 어느새 죽음이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마지막, 그리고 다시 시작

어느 날 아들이 노트 한 권을 내밀었다. “엔딩 노트를 한번 써보는 거 어때요?” 추억도 남기고 가족에게 하고 싶은 말도 적어보라는 이야기가 그럴듯하게 들렸다. 어린 시절부터 떠올리는 순간마다 눈물이 쏟아졌다. 덧없이 흘러간 세월인 줄 알았는데 모든 장면이 생생했다. 스물두 살에 결혼해 멋모르고 낳고 키운 아들들은 여전히 애틋했다. ‘아들 결혼시킬 때까지는 살아야지.’ 엔딩 노트를 쓰면 쓸수록 여기가 끝이 아닐 거라고, 좋은 약이 나올 거라는 희망이 피어났다. 혼자 영정 사진을 찍으러 갔을 때 사진관 사장님도 그랬다. “손님은 젊고 성격이 좋아서 더 오래 사실 거예요. 두고 보세요.”

주변에선 다른 병원도 가보라며 성화였다. ‘서울아산병원에서 해결 못하면 다른 데서도 못하지’라는 마음에 휘둘리지 않았다. 마침 유전자 검사 결과에 기반해 나와 맞는 임상시험약을 찾았다는 이야기를 교수님께 들었다. 만약 다른 병원으로 옮겼다면 이런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2018년 5월. 임상시험을 진행하는 종양내과 윤신교 교수님으로 주치의가 바뀌었다. 섣불리 기대하지 않으려고 해도 마음은 이미 들떠 있었다. 그런데 임상시험 코디네이터로부터 이전에 면역 항암제를 썼던 환자는 임상시험 대상자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에게 운이 닿지 않는구나.’ 맥없이 포기 하려니 속이 시끄러웠다. 이틀을 끙끙 앓았다. 그때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윤신교 교수님께서 제약 회사에 전화해서 이 환자분께 꼭 필요한 약이라며 설득하셨어요!” 교수님께 특별히 부탁한 적도 없거니와 오래 만난 사이도 아니었다. 고맙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암을 이겨내는 것으로 보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화사해진 나날

새로운 항암제를 시작하고 고열과 근육통으로 가까운 병원 응급실에 단골손님처럼 드나들었다. 약을 먹고 끊기를 반복하며 차차 몸에 적응시켰다. 그야말로 생존에 매달린 하루하루였다. 진료 날 윤 교수님이 대뜸 “어머, 오늘 너무 예쁘시다~”라며 나의 화사한 옷을 알아봐 주었다. 무슨 옷을 입고 나온 줄도 몰랐는데 교수님의 이야기에 거울 속의 나를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옷에 맞는 화사한 표정을 지어보니 뭔가 기분도 달라지는 듯했다. 또 어떤 날의 교수님은 “이번 명절에 가족들한테 몸이 아주 좋아졌다고 자랑하세요”라며 진단 내용을 대신하고, “하시고 싶은 피부 시술이나 관리 있으면 얼마든지 하세요!” “괜히 입원하거나 약 사 먹지 마시고 맛있는 소고기를 사드세요!”라며 살가운 수다를 이어갔다. 그렇게 진료실을 나서면 ‘이제 나는 다 할 수 있구나, 해도 되는구나!’라는 묘한 자신감에 표정이, 목소리가, 걸음걸이가 달라졌다. 드디어 소량의 암만 흔적처럼 남았다는 기쁜 소식이 들렸다.

 

암 투병 11년 차. 다음 달이면 아들이 결혼한다. “엄마가 오랫동안 곁에 있어 줘서 나도 무사히 장가를 가게 됐어.” 무뚝뚝한 아들의 속 깊은 한마디에 가슴이 뭉클했다. 십여 년간 여러 고비를 만나며 늘 숨에 찼지만 결국 나는 간절한 꿈에 도착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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