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환자 이야기 30년을 지킨 약속 2022.11.07

 

나의 매일은 새로운 기록으로 쌓이고 있다. 국내 간이식 최장기 생존자여서다. 1992년 10월 9일 수술실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예상 수명은 6개월에 불과했다. 30년 전 수술실에서 나의 생사를 위해 싸워준 서울아산병원 간이식·간담도외과 이승규 석좌교수와 만났다. “이상준 선생님, 우리가 처음 만난 지도 30년이 됐네요. 건강하게 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수님, 서울아산병원 간이식이 벌써 8천례를 달성한다면서요? 정말 애쓰셨습니다.” 우리는 서로 덕분이라며 옛이야기를 시작했다.

 

시련과 믿음

수백 명의 직원을 둔 전자 회사의 대표로 마흔을 넘길 즈음이었다. 회사를 나의 분신처럼 여기며 일했지만 정작 나 자신을 돌보는 일에는 인색했다. 붉은 반점이 온몸에 오톨도톨 솟고 부쩍 건조해진 다리를 긁적댈 때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얼굴에 병색이 완연해지고 배에 복수가 차서야 서울아산병원을 찾았다. B형 활동성 간염이 간경화로 진행된 상태였다. 1년 6개월 남았다던 예상수명은 이내 6개월로 줄었다. 예상수명이 짧아질수록 시름은 깊어졌다. 되도록 빨리 미국에서 간이식 수술을 받을 것을 권유받았다. 마음의 준비를 하던 중에 이승규 교수의 간이식 성공 소식이 들렸다. 나의 운명은 하늘의 뜻일 테니 서울아산병원에 수술을 맡기기로 했다. 나의 결심을 듣고 국내 수술을 극구 말리는 친구도 있었다. 나를 걱정하는 마음이었을 테지만 돌아보면 이승규라는 미래의 세계 최고 간이식 수술 명의를 몰라본 것이다.

 

30년 전 그날

1992년 10월 8일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기증자가 나타났는데 6시까지 병원으로 오세요.’ 여러 검사를 거쳐 바로 다음 날 새벽에 수술실로 향했다. 눈을 감고 부모보다 일찍 죽는 불효만은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눈물이 날까 봐 아내의 얼굴도 보지 못했다. 그렇게 나는 이승규 교수의 세 번째 간이식 환자가 되었다.

이승규 교수가 그날의 사투를 들려주었다. “앞선 두 번의 간이식 경험에서 제게 확신이 생겼어요. 그런데 이 선생님의 수술은 매 단계가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아직 스태프가 꾸려지지 않아서 혼자서 뇌사자의 장기 적출과 이식 과정을 집도해야 했어요. 용변 걱정에 물도 못 마셨죠. 수술실을 나오니까 23시간이 지났더라고요. 그런데 중요한 건 수술 시간이나 수혈량이 얼마나 들었는지가 아니에요. 건강하게 잘 이식되었는가죠. 그것만은 정말 만족스러웠어요.”

눈을 뜬 순간 이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음을 직감했다. 성공은 헛되고 나는 너무 많은 것을 받으며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돌아와 미련 없이 회사를 정리했다. 출판사를 차리고 선교 일을 하며 간이식 환자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힘을 모으면

나보다 앞서 이식받았던 환자가 수술을 잘 받고도 치료비 부담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불과 죽기 한 달 전에 우리 집에 들를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 억장이 무너졌다. 평생 면역억제제를 맞으며 살아야 하는 간이식 환자들은 경제적 압박까지 안고 있었다. 이승규 교수가 환자들을 배려해 무상으로 약을 주고 수술비 마련을 위해 힘썼지만 개개인의 노력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의료 보험 적용이 절실했다. 한국간이식인협회를 세우고 나의 돈과 시간, 인적 네트워크를 총동원했다. 체면도 버리고 배에 난 수술 자국을 내보이며 ‘우리 간이식인들의 눈물을 알아달라’ 호소했다. 이승규 교수는 의사 소견서를 써주며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었다. 결국 2001년에 건강보험이 적용되었고 45일마다 270만 원씩 내던 치료비는 11만 원으로 크게 줄었다. “지금의 간이식 환자들은 이 선생님의 덕을 보고 있는 거예요. 뇌사자 장기 기증 시스템이 만들어지는데도 참 애쓰셨죠.” “교수님, 그만큼 제게는 일상의 감격이 있었어요. 교수님의 의술이 도구가 되어 제가 살았듯이 제가 할 수 있는 것들로 누군가를 살리고 싶었습니다.”

 

서로의 의미

이식을 앞둔 환자들이 앞으로 얼마나 살 수 있냐고 물으면 장기이식센터의 코디네이터들은 내 이야기를 꺼낸다고 한다. 관리만 잘하면 30년은 끄덕없다고. 내가 살아있는 것만으로 누군가에게 희망이 된다니 참 다행이다. 사실 나의 자랑은 얼마나 살았느냐 보다 30년간 아픈 곳 없이 건강하게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 비법은 단연 ‘순종’이다. 교수님이 하라는 그대로 술과 담배를 멀리하고 약 한번 거른 적 없이 즐겁게 병원에 다녔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1만 보 이상을 걸으니 이제는 내 또래의 누구보다 체력이 좋다. 내가 젊은 날에 내려놓은 것 이상으로 훨씬 풍성해진 삶을 갖게 된 것이다. 손주들의 성장을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아내와 맛있는 식당을 찾아다니는 일흔 너머의 일상이 늘 감사하다.

 

이승규 교수와 만날 때마다 나누는 레퍼토리인데 감격은 여전했다. 겨우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서 이 교수는 환자들에게 가보겠다고 했다. 문득 젊은 시절에 ‘수술실에서 생명을 살리다가 내 생을 마치고 싶다’고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때는 ‘섬뜩하게 그게 무슨 말입니까’하고 웃어넘겼는데 그 말이 진심이었다는 걸 이제는 알 것 같다. 30년 전에도 일요일마다 쉬지 않고 나의 병실에 찾아왔었다. 첫 간이식 환자가 예기치 못한 감염으로 50일 만에 사망하면서 속상한 마음을 내게 털어놓기도 했다. 그러면서 당부했다. “이상준 선생님이 잘못되면 앞으로 제가 간 이식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부디 건강하세요.” 나는 그 약속을 지켰다. 그리고 이승규 교수는 나를 작은 주춧돌 삼아 무수히 많은 환자를 살렸다. 새삼 환자였던 나보다 더 희끗희끗해진 머리와 굽은 어깨를 보니 미안하고 고맙다. 생명으로 생명이 이어지는 길목에서 나는 여전히 감동하고 감사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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