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환자 이야기 내 운명이 어떤 모양이든 2023.02.20

 

 

유방암이 재발되어 회사에 휴직계를 내고 오는 길이었다. 새로 산 블루투스 마이크를 꺼내 들었다. 고요한 집안에 김연자의 ‘아모르파티’ 반주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누가 들을까 황급히 볼륨을 낮췄다. 하지만 이내 흐르는 노래를 따라 고음을 내지르며 어깨를 들썩였다.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면 돼 인생은 지금이야~’ 울 수만은 없어 부르는 노래였다.

 

지나가는 시련쯤

2016년이었다. 건강검진 후 가슴속에 뭔가 보인다며 정밀 진단을 권유받았다. ‘특별히 아픈 것도 아닌데 뭘….’ 직장 일과 두 아들의 뒷바라지를 하다 보면 내 건강을 챙기는 일은 항상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이듬해, 샤워하다가 가슴에 확연한 변화가 눈에 띄었다. 만지는 곳마다 딱딱한 것이 잡혔다. 대번에 유방암이라는 걸 예감할 수 있었다. ‘내게도 이런 일이 닥치는구나!’

사람들의 추천을 받아 서울아산병원을 찾았다. 종양내과 정재호 교수가 주치의였다. 남편이 했던 질문을 하고 또 해도 정 교수는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차분하게 설명했다. 간혹 내가 아프다고 하면 “너무 아프시죠? 다 알아요”라며 따스하게 공감해 주었다. 진료 스타일을 알고 나니 외래 대기가 길어져도 ‘우리 교수님 또 환자들 달래 주느라 애쓰시는구나’ 하고 넉넉한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었다. 그렇다고 치료가 수월한 것은 아니었다. 암 환자가 받을 수 있는 모든 치료 과정이 이어졌다. 항암과 호르몬 요법, 방사선 치료, 유방 전 절제 수술과 복원까지 일 년 내내 진행된 모든 치료 과정이 고달팠다. 그런데도 나는 종종 운이 좋다고 느꼈다. 좋은 의료진을 만났고 직장에선 치료와 일을 병행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나만 참고 노력하면 다 지나갈 일 같았다. 12회의 표적치료제 투약을 거진 마치면서 조심스레 완치를 확신할 즈음, 가슴에 새까만 점이 하나 보였다.

 

재발, 무너진 마음

피부과에 입원해 각종 검사를 받았다. 암이 피부와 림프절로 전이된 상태였다. 암울한 결과를 들고 다시 만난 정 교수는 나보다 더 놀란 눈치였다. “이렇게 재발하는 경우가 흔치 않은데…. 수술도 불가능한 부위여서 치료가 쉽지 않겠네요.” 나의 운도, 운명도 여기까지인 듯했다. 재발하면서 온몸에 암이 전이되어 끝내 사망하는 환자를 많이 봐왔다. “하지만 호전되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표적치료제를 중단하고 더 잘 맞을 것 같은 약으로 오늘부터 바로 들어갈게요.” 정 교수는 잠시 일을 쉬면서 치료에 집중하자고 했다. 그 말이 꼭 인생의 마지막을 정리할 시간을 가지라는 의미로 들렸다.

돌아보면 20여 년간 나를 위해 쉰 날이 하루도 없었다. 부산에서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남편과 서울로 올라왔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직장 생활을 하며 아이들을 키웠다. 양가의 도움을 조금이라도 받았으면 하는 아쉬움도 많았지만 그 시간도 빠르게 지나갔다. 그런데 전력 질주한 결과가 암이라니. 통증보다 견디기 힘든 건 무력감이었다. 더 이상 열심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잊고 살았던 것들

재발 소식에 친정엄마가 상경했다. 늘 무덤덤하고 긍정적이던 딸이 남몰래 무너지고 있는 걸 엄마는 알아챘다. “내 딸은 다시 건강할 수 있다!”라며 매 끼니를 지극정성으로 챙기는 바람에 입맛이 없다고 밥상을 무를 수 없었다. 엄마는 매일 내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항암 하는 날에도 예외 없이 엄마와 나는 산책을 했다. “엄마, 병원은 혼자 다녀올게. 그래야 빨리 움직이지”라는 데도 엄마는 먹을 것을 챙겨서 따라나섰다. 진료가 비는 시간마다 우리는 병원 공원에서 도시락을 나눠 먹으며 사계절을 만끽했다. “아, 좋다~” 숨 쉬듯 나오는 감격에는 이 광경을 더 보고 싶고, 더 살고 싶다는 마음이 묻어 있었다.

매일 병원을 오가면서 암 환자를 위한 미용 수업을 신청했다. “우린 다 같은 머리 스타일이니까~” 민머리를 아무렇지 않게 내놓은 환자들과 예뻐지는 방법을 이야기하다가 피식 웃음이 났다. 미용 정보야 어디서든 찾을 수 있겠지만 내가 환자라는 생각을 잊게 만드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암교육정보센터에서 운영하는 명상과 요가, 꽃꽂이 프로그램 등도 신청했다. 배워보고 싶었지만 바빠서 포기했던 것들을 암 환자가 되어 하나씩 도전할 수 있었다. 늘 긴장 상태였던 몸과 마음이 병원에 올 때마다 조금씩 기분 좋게 느슨해졌다. ‘서울아산병원에 오는 게 매일 더 좋아져서 천만다행이야.’ 

 

남은 삶의 자양분

혈관이 잘 잡히지 않는 날이었다. 발등에 채혈하려던 간호사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금세 충혈된 눈에 저릿해진 팔을 흔들어 풀면서 계속 나에게 미안해했다. 나의 좁고 약해진 혈관 때문일 뿐인데…. “선생님을 고생시켜서 제가 더 미안해요. 마음 써줘서 고맙고.” 매번 서울아산병원 의료진의 실력에 감탄하곤 했다. 그런데 작은 일까지 마음을 다하는 의료진에게 받는 감동이 훨씬 컸다. 정 교수는 작은 염증이라도 보이면 “호흡기내과 진찰을 받을 때 이거 정밀 검사를 받아야 하는지 물어보세요. 꼭 하셔야 해요!”라며 꼼꼼하게 코치했다. 매번 “계속 좋아지고 있어요”라고 이야기해 주면 ‘그냥 하는 이야기겠지?’ 의심하면서도 곧 복직도 하고 원래 생활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도 커졌다. 그러면 버틸 힘이 났다.

2020년 7월. 완전히 암이 사라졌다는 진단을 받았다. 나조차 믿기 어려웠다. 2년 10개월 만에 회사로 돌아갔을 때 “예전보다 훨씬 밝아졌네”라는 인사가 쏟아졌다. 그동안 가족과 여행하고 대화하면서 추억도 든든하게 비축해 두었다. 남은 삶의 든든한 자양분이 될 듯했다. 조금 처절한 40대 중·후반을 보냈지만 이제야 비로소 내 인생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됐다.

 

보다 건강한 콘텐츠 제작을 위해 이 콘텐츠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을 말씀해 주세요.

뒤로가기

서울아산병원 뉴스룸

개인정보처리방침 | 뉴스룸 운영정책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