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환자 이야기 잠시 달리기를 멈추고 2023.03.20

 

연현이는 나가는 육상 대회마다 1등이었다. 온몸의 기운을 모두 쏟아붓는 데 걸리는 시간은 10여 초. 출발 전에는 까마득하게 보였던 결승선이 순식간에 발뒤꿈치 뒤편에 있었다. 몇 번의 경험으로 전력 질주의 즐거움이 커질 때쯤 ‘범혈구 감소증’이라는 낯선 질병을 진단받았다. “완전히 새로운 트랙에 서는 느낌이었어요. 완주하는 데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야말로 전력 질주해야겠구나 싶었죠.”

 

달라진 결승선

연현이는 2019년 소년체전에서 육상 100m와 800m 종목에서 2관왕을 차지하면서 주목받았다. 단거리와 중·장거리를 모두 잘 뛰는 선수는 흔치 않아서 공중파 TV에 육상 영재로 소개됐다. 그것도 단거리 코치가 없는 전북 정읍에서 방과 후 아빠와 연습하며 쌓은 실력이었다.

2021년 봄부터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항문의 통증으로 이어졌지만 달리기 연습을 멈춘 날은 없었다. 앉아있기도 힘들어지고서야 병원을 찾았다. 동네 병원을 거쳐 지역 종합병원에서 항문 쪽의 종양을 발견했고 백혈구, 혈소판, 적혈구 모두 제로에 가까운 상황을 확인했다. 그곳에선 치료하기 어려운 질병이었다. 늦은 밤 서울아산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소아청소년종양혈액과 임호준 교수님은 첫 만남부터 심각한 상황을 가감 없이 설명해 주셨어요. 솔직히 충격의 연속이었죠. 자세한 내용을 다 이해하기는 어려웠지만 그만큼 어려운 상황이고 빨리 치료에 집중해야 한다는 건 알겠더라고요.” 입원 후 조혈모세포 이식을 준비했다. 어떻게 병간호를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아빠에게 어린이병원간호팀 최은석 전문간호사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 “아들이 병마와 싸우는 동안 제 마음도 매 순간이 전쟁터였어요. 대신 아플 수도 없고 황망한 마음에 생각만 많아지더라고요. 제 아이에게 이렇게 큰 병이 생길 줄 알았으면 더 악착같이 돈을 벌어 둘 걸 처음으로 후회도 해봤죠.”

 

다정하고 각별한

연현이가 돌을 지나기 전, 아빠는 서울의 삶을 모두 정리하고 전북 정읍에 정착했다. 방문교사 일을 시작한 건 육아와 병행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연현이는 아빠의 수업을 따라다니며 자연스럽게 글을 배우고 책에 흥미를 붙였다. 수업이 없는 날이면 부자는 목적지도 없이 여행을 떠나곤 했다. 가족이라곤 단 둘뿐이었지만 그래서 더욱 다정하고 각별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연현이는 달리기에 소질을 보였다. 도 대회에 나가 1등을 차지했을 때 다른 사람들은 연현이의 남다른 운동 신경에 감탄했지만 아빠에겐 결승선에 닿은 연현이의 표정만 보였다. 활짝 웃는 모습이었다. ‘재미를 느끼는 일이라면 잘할 수 있겠구나!’ 그때부터 아빠는 모든 훈련을 함께했다. 연현이는 나가는 육상 대회마다 이변이 없는 한 우승의 기쁨을 안고 돌아왔다. 훈련과 대회 일정으로 바쁜 와중에 공부도 놓지 않았다. 나중에 올림픽 위원도, 의사도 되고 싶은 꿈이 있었다. 아빠는 뭘 도울 수 있을지 고민이 많아졌다. 아빠의 꿈은 늘 연현이에게 최고의 아빠가 되는 것이었다.

 

고통 속에 만난 멋있는 어른들

2021년 10월. 이식을 앞두고 항암 과정에서 연현이는 일주일 내내 구토했다. 이식한 후에도 계속 마음 졸이며 무사히 생착되기를 기다렸다. 온몸이 마치 도깨비방망이처럼 울퉁불퉁하게 부어서 한순간도 편히 쉴 수 없었다. 정맥에 삽입한 카테터가 세균에 감염되면서 2주간 열이 끓기도 했다. 혼자 끙끙 앓으면서도 아픈 걸 잘 표현하지 않는 연현이에게 간호사들은 매시간 찾아와서 살펴보고 당부했다. “연현아, 아프면 꼭 얘기해.” “약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따뜻한 한마디로 고통이 줄어들 리 없지만 조금 더 버틸 힘이 되었다. 임호준 교수는 그때그때 나타나는 증상의 이유와 해결 방법을 막힘없이 설명했다. 연현이에겐 때로 따뜻하게, 때로 명쾌하게 환자를 대하는 의료진이 누구보다 멋있게 보였다. 하루 앞을 예상하기 힘든 상황에서도 의사가 되고 싶은 꿈만은 선명해졌다.

 

도움에 보답하는 삶

매일 치료비와 생활비 부담이 쌓이고 있었다. 아빠 혼자서 해결하기엔 넘기기 힘든 고비였다. 그때 서울아산병원 사회복지팀에서 치료비 지원은 물론 희귀 질환, 한부모가정의 환자 등을 대상으로 한 각종 지원 사업을 연결해주었다. 한결 가벼워진 아빠의 목소리를 연현이는 단번에 알아챘다. 사회복지팀에서 받은 도움을 건네 듣고 감사 편지를 썼다. ‘하나뿐인 아들이 잘못될 수 있다는 불안과 많은 치료비가 드는 현실이 아버지를 힘들게 하는 것 같아 제 마음도 아팠습니다. 그런데 가뭄에 단비 같은 후원자님의 보살핌으로 한시름 놓은 아버지를 보며 기뻤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반년 가까운 병원 생활 끝에 연현이는 무사히 퇴원했다. 외래에 올 때마다 부자는 장갑과 마스크, 모자로 꽁꽁 싸매고 나타났다. “이식한 후에 감염되면 치명적이잖아요. 백혈병 환자들이 모인 쉼터에서 잠시 머무를 때 잘 치료받고도 부주의한 관리로 악화된 환자를 많이 봤어요. 제가 받은 도움에 보답할 방법은 건강해지는 것뿐인데 조심해야죠.” 연현이의 이야기에 아빠는 한마디를 더 보탰다. “이식하고 지난 1년간 외출도 되도록 줄이고 익힌 음식만 먹었어요. 지독하게 관리했죠~”

고등학생이 된 연현이는 아직 운동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하지만 공부와 독서에 빠져 지내며 새로운 꿈을 키워가고 있다. “제가 아빠 나이쯤 되면 지금이 제 성장 드라마의 오프닝 장면처럼 보일 것 같아요. 의사가 되어서 소아 환자들에게 꿈꾸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말해주고 싶어요.”먼 훗날을 상상하던 연현이가 활짝 웃었다. 육상 대회 결승선에 닿을 때도 꼭 이런 표정이었다고 아빠가 흐뭇하게 웃으며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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