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환자 이야기 아주 특별한 생일 2023.06.20

 

 

“아내의 수술동의서를 쓰는 순간부터 눈물이 멈추질 않았어요. 결과를 장담할 수 없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심현승 씨는 그때 처음 대동맥박리라는 질병을 들어보았다. 심지어 아내는 오랫동안 기다린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 수술실 밖에서 의료진의 연락만 기다리는 하루가 너무 길었다. 정작 당사자인 이순옥 씨에겐 수술실의 기억이 남아있지 않았다. 배에 남은 커다란 수술 자국으로 그 시간을 추측할 뿐이었다. “마음고생한 남편에겐 미안하지만 저에게 그날은 생일 같아요. 죽다 살아났으니까. 제 아이와 같은 날 다시 태어난 거죠.” 2023년 1월 26일. 그 날의 이야기를 퍼즐처럼 맞춰보았다.

 

순옥 씨의 오전

“그날 오전에 친구와 통화하다가 목부터 굳어지는 통증을 느꼈어요. 순식간에 숨이 막히더라고요.” 친구가 119와 남편 현승 씨에게 연락하는 동안 순옥 씨는 물을 한 잔 마시고 창문을 열었다. 세찬 1월의 한기가 집안에 밀려들었지만 생사를 넘나드는 통증과 두려움으로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때였다. 배 속에서 아이가 움직였다. 엄마를 깨우려는 듯이. ‘아이는 살려야 해!’ 정신이 번쩍 들면서 숨을 쉬는 데에만 집중했다. 병원에 실려 가는 중에도 아이부터 살려달라는 말을 반복했다. 구급차는 20분 만에 서울아산병원에 도착했다. 연락을 받고 회사에서 달려온 남편이 순옥 씨의 손을 꼭 잡았다. “이제 괜찮을 거야!”

의료진은 다급히 순옥 씨의 상태를 확인하고 검사를 진행했다. “아이는 살아있습니다!”라는 의료진의 이야기가 들렸다. 순옥 씨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12시 50분. 수술실 문이 열렸다. 수십 명의 의료진이 분주하게 수술을 준비하고 있었다. ‘살아서 나갈 수 있을까?’ 드문드문 이어지던 순옥 씨의 기억은 이내 끊어졌다.

 

수술실의 오후

“오전 수술을 마칠 무렵 연락을 받았습니다. 임신 33주 차의 대동맥박리 환자는 저도 처음 접하는 케이스였어요. 예정된 오후 수술을 취소하고 응급 수술에 들어갔죠.” 심장혈관흉부외과 유재석 부교수는 연락을 받고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산모의 대동맥박리 수술이 먼저일까, 제왕절개 수술이 먼저일까. 대동맥박리는 병원에 오기도 전에 환자가 사망하는 경우가 있을 만큼 위중한 질환이었다. 쉽지 않은 오후가 될 것은 분명했다.

수술실에는 마취통증의학과, 산부인과, 신생아과, 수술간호팀 등 수십 명의 의료진이 빠르게 모였다. 산부인과 김소연 조교수가 제왕절개 수술을 시작했다. 태아를 꺼내는 도중에 대동맥박리가 진행되거나 혈압이 유지되지 않으면 산모의 생명이 위험했다. 마음을 졸이며 기다리던 유 부교수는 채 10분이 지나기 전에 새 생명의 탄생을 볼 수 있었다. 여기저기서 낮은 안도와 감격의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이는 자가 호흡을 하지 못해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응급 상황에서 중압감을 안고 제 역할에 집중하던 수십 명의 의료진은 작은 생명에게서 큰 힘을 얻고 있었다. 이제는 유 부교수가 산모를 살릴 차례였다.

환자는 곳곳의 혈관이 찢어져 있었다. 손상된 관상동맥과 대동맥을 연결하고 대동맥판막을 교체했다. 수술은 밤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환자의 남편에게 전화했다. 수술 결과를 알리자 전화기 건너편에서 당황스러울 정도로 오열하는 소리가 들렸다. 방금 수술을 마친 환자는 대동맥박리 환자이기 이전에 누군가의 딸이자 아내고, 엄마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듯했다.

 

현승 씨의 밤

“밤 9시가 훌쩍 넘어 걸려온 교수님의 전화를 끊고 나서야 그날 한 끼도 먹지 않았다는 걸 알았어요.” 현승 씨는 수술이 끝나길 기다리며 수많은 경우의 수를 떠올렸다. 결과는 무조건 아이와 아내가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어야 했다. 오후 내내 흘린 눈물은 아내와의 추억을 향했다가 오랫동안 기다린 아이에 대한 간절함으로 이어졌고,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는 자책과 얼굴도 모르는 의료진을 향한 응원 사이를 내내 오갔다. 유 부교수의 전화를 끊고서 안도의 눈물을 마저 흘렸다.

그날 밤 현승 씨는 잠이 오지 않았다. 아내를 수술실에 보내고 아버지와 통화한 내용을 떠올렸다. ‘현승아, 울지 말고 이제부터 네가 가장 역할을 똑바로 해야 한다. 우선순위는 무조건 네 아내인 거 알지?’라며 단단한 마음을 주문했었다. 즐겁기만 했던 신혼을 지나 이제야 진정한 가족이 된 기분이었다. 겨우 잠든 새벽,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여보, 나야….” 중환자실에서 깨어난 아내가 간호사에게 통화를 부탁한 것이다. 아내에게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았는데 한마디밖에 나오지 않았다. “살아줘서 정말 고마워.”

 

지속되는 하루의 의미

부부는 딸의 이름을 ‘루아’로 지으면서 서울아산병원의 ‘아’를 넣자는 이야기를 나눴다. 8개월만에 태어난 루아는 신생아중환자실에서 치료 받으면서 기도에 삽관한 인공호흡 장치를 금세 제거했다. 스스로 젖병을 빠는 힘도 생겼다. 그동안 순옥 씨는 자신의 회복에 집중할 수 있었다. “막연히 서울아산병원은 저와 상관없는 곳이라고 생각해 왔어요. 늘 건강할 줄 알았거든요. 위급한 상황에서 그 진가를 몸소 알게 됐죠. 응급실에서부터 의료진의 빠른 결정과 의료 시스템, 실력이 느껴졌어요. 저희를 늘 따뜻하게 응원하고 배려해 주셨고요. 가끔 상상해 봐요. ‘그날 이곳에 오지 못했다면 우린 어떻게 됐을까?’ 아마 오늘이 있지 않았을 거예요. 주변 사람들도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서울아산병원을 만난 게 천운이었다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간 부부에게 새로운 육아 일상이 펼쳐졌다. 1월 26일의 눈물과 감격은 정신 없는 일상에 묻혀 희미해져 간다며 부부는 웃었다. 다만 세 가족이 함께 웃는 찰나에도 벅찬 행복을 느낀다고 했다. 살아있는 이 순간이 지속되고 있음에 용기를 얻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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