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환자 이야기 7년의 기다림 2023.10.19

 

 

태준이가 아홉 살 때, 나란히 누워 잠을 청하던 밤에 말했다. “엄마, 내 몸이 이상해지는 것 같아. 꾸물꾸물해.” 흘려 들은 그때 그 말이 증상의 시작점이란 걸 나중에야 알았다. 그 뒤로 태준이는 계단이 무섭다면서 조금 가다 넘어지고 또 넘어졌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도 주저앉긴 마찬가지였다. 도저히 문제의 원인을 가늠할 수 없었다. 서울아산병원 재활의학과와 이비인후과를 거친 끝에 소아신경과 염미선 교수님을 만났다. 당장 입원해 검사해 보니 뇌에 큰 출혈이 보였고 난치성 뇌전증 진단을 받았다. 

 

넘어지고 일어서고 

태준이는 갑작스러운 소리나 동작, 뜨거운 것에 발작하기 시작했다. 숟가락을 떨어뜨리는 소리에도 어김없었다. “태준아 괜찮아. 천천히 일어서면 돼.” 15초쯤 기다리면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지만 순식간에 위험한 상황으로 이어지곤 했다. 태준이는 달라진 자신을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한동안 돌봄 선생님을 곁에 오지 못하게 하고 휠체어도 타지 않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태준아, 안경 낀 사람이 장애인일까? 휠체어도 똑같은 보조 기구일 뿐이야.” 우리는 설득할 것이, 태준이는 체념할 것이 매일 늘었다. 5학년부턴 학교 대신 집에서 수업을 듣기로 했다. 가끔 길에서 하교하는 태준이 또래의 아이들을 마주치면 속이 상했다. 태준이도 한때 그 속에서 엄마를 향해 손을 흔들곤 했었다. ‘도대체 이 상황의 바닥은 어디까지일까.’ 늪에 빠진 기분을 이겨내는 것이 매일의 숙제였다. 

종종 화장실 안에서 ‘쿵’ 소리가 나면 심장이 멎는 듯했다. 태준이가 경직이 풀려 문을 열어줄 때까지 문 밖에서 기다려야 했다. 위험하니 화장실 문은 열고 들어가라고 해도 소용없었다. 타일 바닥에 머리가 깨지고 눈가가 찢어져 응급실에 갔던 날, 태준이는 처치 받는 내내 아픈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빨갛게 상기된 손에는 손톱자국이 선명했다. 주먹을 꽉 쥐고 통증을 참은 것이다. “태준아, 네가 제일 아프고 속상한 거 알아. 그런데 이런 일이 생기면 너만큼 가족들도 아파. 그러니까 너도 우리를 도와줘.”

 

교수님의 말 속에는

2년간의 약물 치료로는 차도가 없었다. 당시 뇌전증 병소를 찾는 기술이 없어 수술도 불가능했다. 다른 방법을 찾아보고자 병원을 옮겼다. 그런데 새로운 교수님은 처방에 관해서만 이야기할 뿐 태준이와 눈도 잘 마주치지 않았다. “어차피 나는 병원에 갈 필요 없잖아요. 엄마가 약만 타오면 안 돼?” 점점 자극에 예민해지는데도 태준이는 통 병원에 따라나서질 않았다. ‘염미선 교수님의 말이라면 웃으며 잘 따랐는데···.’ 오래 전 염 교수님과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진단 내용을 어린 태준이가 듣고 충격을 받을까 봐 안절부절못했었다. 그러자 교수님은 “태준이도 알 건 알아야죠”라며 거침없이 설명을 이어갔다. 여러모로 심란한 귀갓길에 태준이가 물었다. “엄마, 아까 뇌 사진에서 하얀 게 많이 보이던데, 다른 사람들이랑 좀 다른거지?” 우리는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생긴 변화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순간엔 뭔가 숨기거나 거를 필요가 없었다. 교수님이 우리의 대화를 끌어낸 것이다. 아이의 마음을 아는 의료진을 만났다는 안도와 기대감이 들었었다. ‘그래, 어차피 새로운 치료법이 없다면 염 교수님께 돌아가자!’

“5년 만이네요! 반가워, 태준아.” 염 교수님은 어제 만난 것처럼 돌아온 우리를 반겨주었다. “태준아, 인생은 되게 길어. 넌 아마 80년쯤 더 살겠지? 그사이에 좋은 약도 나올 거야. 그러니까 열심히 운동하고 공부하면서 희망을 가져. 선생님이 어떻게든 휠체어 없이 걷게 해줄게.” 꼭 엄마에게 들려주는 위로 같았다. 희망은 엄마에게도 필요한 법이었다.  

 

아픔이 걷힐 차례

지난해, 진료 중에 스치듯 물었다. “교수님, 수술받을 여지는 전혀 없을까요?” “혹시 돈이 많이 들어도 괜찮을까요?” 뭔가 해볼 수 있다는 이야기는 7년 만에 처음이었다. “방법만 있다면 집을 팔아서라도 해야죠.” 그렇게 뇌전증 병소를 찾는 SEEG수술이 진행됐다. 이제 막 도입된 새로운 수술적 기법이었다. 우리는 두려운 마음보다 간절함이 더했다. “태준아, 힘들더라도 최대한 참아 봐. 그리고 정확하게 표현해 줘.” 신신당부하며 아이를 들여보냈다. 신경외과 홍석호 교수님은 며칠간 태준이의 두개골에 전극을 삽입해 전기자극 반응을 살폈다.

“엄마, 머리 곳곳이 욱신거려서 밤마다 집에 도망가고 싶었어.” “잘 참았어. 장하다 우리 아들!” 다행히 병소는 수술할 수 있는 부위에서 발견됐다. 신경 제거 수술이 이어졌다. 수술 후에도 열과 부기는 한참 동안 가라앉지 않았다. “힘들어도 움직여야 나을 수 있어.” 염 교수님의 충고에 태준이는 눈물이 그렁그렁하면서도 통증을 참고 일어났다. 왼쪽 머리를 크게 두른 수술 자국이 예전에 주먹을 꽉 쥐고 통증을 참아내던 손톱자국처럼 보였다. 다시 건강하던 때로 돌아가고 싶은 태준이의 간절함을 알 것만 같았다. 

 

네 삶의 주인공이 되어줘

발작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7년간의 고생이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 있다니. 우리는 어리둥절하면서도 행복했다. 태준이는 뒤처진 언어와 동작을 재활치료 받으며 체중 감량에 도전했다. 집에만 있다 보니 100kg을 훌쩍 넘긴 터였다. 식이요법과 운동으로 반년 만에 40여 kg을 감량했다. 성취감을 맛본 얼굴엔 자신감이 서렸다.

새로운 사이즈의 옷을 사고 오는 길에 태준이가 말했다. “엄마, 나는 세상에서 내가 제일 좋아!” “너는 맨날 너만 생각하더라~” “혹시 엄마가 아니라서 서운해요?” “아니! 네가 그렇다니 엄마는 더 좋지. 평생 널 아끼며 살아!” 이제는 한 발짝 떨어져서 열일곱 살 태준이의 홀로서기를 응원할 것이다. 마음 졸이지 않고, 마음껏 웃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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