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환자 이야기 30년만의 ‘화해’ - 위암 4기 완치, 심순복편 2014.03.06

“길어야 6개월입니다.” 제대로 된 시한부 선고였습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거나 놀랄 새도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길어야’라는 단서는 더 절망적이었습니다. 2002년 목에 혹이 잡혀 찾은 대전의 한 대학병원에서 의사는 침착하지만 차가운 어조로 위암 말기 선고를 내렸습니다.

 

심순복: 제가 중학교 1학년때 아버지가 위암으로 돌아가셧어요.
30년이상을 아버지를 미워하고 원망하고 아버지에 대한 그런 나쁜감정을 품고 살았었는데
정말 곤겨럽게도 딱 그 아버지 나이에 제가 위암이란걸 알게 된거에요.

자막:30년만의 화해 - 위암완치자 심순복편 

심순복: 2002년도 11월이였구요 위암 4기 진단을 받고 아~ 아버지가 먼저 떠올랐어요 아버지한테 용서를 빌었죠
내가 꼭 그 입장이 되고보니까 내 어린 자식을을 세상에 놓고 떠나기 싫어졌다고 그니깐 아버지 용서해 주고 날좀 살려달라고

자막:미움 마음속 깊이 품고 있던 미움이 암이 되었습니다.

"엄마 암이래..."
어린 아들의 눈물에서 나의 어린시절이
어린 아들의 눈물에서 슬픈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심순복: 슬픈 엄마에 대한기억을 주고 가면 안될꺼 같다.그래서 아~ 엄마로서 최선을 다하고 떠낫구나 우리엄마
씩씩한 모습으로 남겨주고 가야겠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아산병원 갔죠. 아들하고 같이

뱃속 깊숙히 있는 대동맥 주위 여러 림프절에 다 전위가 됐고 이런 경우 그래도 10% 저기 확률은 있다고 하셧어요
그때 제가 희망이 생기드라고요. 10%? 나는 1%만 있어도 나는 할 수 있을꺼 같았어요

자막: 10%의가능성..."어떻게 살 수 있겠어요? 물어봤지만 그것은 희망이였습니다. 

심순복: 11월부터 항암치료 하기 시작해서 7월달에 끝났어요 2003년 7월에 9차례를 5년째 되던 해에 정기검진,CT,내시경,혈액검사,폐X-ray 이런 정김검진 다 하신 결고보시고 인제 정말 아무이상이 없다고,완치됐다고..

심순복: 암이라고 하면 죽음을 연상하게 되잖아요 어두운시기지만 빛을 잉태하는 그 동트기 직전이거든요
비록 희망을 나눌수 있고 이렇게 서로 감사를 나눌수 있고 이러한 시기가 분명히 오니까 완치 판정을 받을수 있을때까지 힘내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자막:미움이 떠란자리 남겨진 것은 사랑이였습니다 희망은 사랑 가까이에 있습니다.
real story 희망을 나눕니다.

위암 선고

 

“길어야 6개월입니다.”
제대로 된 시한부 선고였습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거나 놀랄 새도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길어야’라는 단서는 더 절망적이었습니다. 2002년 목에 혹이 잡혀 찾은 대전의 한 대학병원에서 의사는 침착하지만 차가운 어조로 위암 말기 선고를 내렸습니다.
그날 심순복씨는 아버지를 떠올렸습니다. 아버지와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될지 30년 전엔 감히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위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지금처럼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때, 이렇다 할 손도 쓰지 못하고 세상과 작별한 아버지를 심순복씨는 원망했습니다.

평생 원망했던 아버지와 같은 나이에 같은 병을 앓게 되니, 두 아들이 눈에 밟혔습니다. 어린 자식들을 남겨두고 떠나야했던 아버지 마음이 겹쳐졌습니다. 깨달음은 늘 뒤늦게 도착하는 모양입니다.
“공교롭게도 아버지와 같은 나이에 위암에 걸렸습니다. 아버지한테 용서를 빌었죠. 일찍 자식 곁을 떠난 게 아버지의 뜻이 아니었다는 걸 아버지 나이가 되어서야 깨달았다고….”

‘말기’, ‘시한부’라는 단어는 심순복씨를 짓눌렀습니다. ‘포기하자’라고 마음먹은 심순복씨는 두 아들이 엄마의 빈자리를 느끼지 않도록 떠날 준비를 해나갔습니다. 장롱 안 묵은 옷과 이불을 정리했고, 엄마 없이 밥을 차려먹을 수 있게 주방도구와 그릇, 양념통에 이름표를 붙였습니다.
포기하려는 엄마를 붙잡은 건 두 아들이었습니다. “지금 엄마가 포기하면 엄마한테 아무 것도 못 해주고 떠나보낸 걸 평생 후회할 것 같다.”는 아들의 말이 가슴에 와 박혔습니다. 가더라도 슬픈 기억이 아닌 최선을 다한, 씩씩한 엄마로 남아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은 심순복씨는 서울아산병원을 찾았습니다.

생존율 10%의 가능성

 

서울아산병원에서 내린 진단도 장밋빛은 아니었습니다. 위에서 제 집터를 튼 암은 비장으로 침범했고, 대동맥 주위 임파선까지 퍼져있었습니다. 강윤구 종양내과 교수는 위암 4기로 진단을 내렸습니다.
“위암 4기 생존율이 10%입니다. 전혀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닙니다. 우선 화학요법 치료를 하면서 결과를 지켜봅시다.”
절망을 더하지도 희망을 빼지도 않은 말이었습니다. 강윤구 교수는 기존 항암제 2개에 새로운 항암제 1개를 더한 항암치료를 했습니다. 위암 4기이다보니 당장 수술할 도리가 없었고, 암의 크기를 줄이는 게 우선이었습니다. 현실은 그대로였지만, 심순복씨는 10%의 가능성에 희망을 가졌습니다.
“10%? 나는 1% 가능성만 있어도 암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2002년 11월부터 2003년 7월까지 심순복씨는 9차례에 걸쳐 항암치료를 받았습니다. 독한 항암제 탓에 머리카락이 빠졌고, 구토 증상이 나타났습니다. 힘들 때 가장 많이 떠오른 건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 산소를 찾아가 용서를 빌고 내려오면서 다짐했어요.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슬픈 기억을 남기지 말자고, 말기 암 환자의 생존율이 1%라고 해도 이 병을 꼭 이기겠다고.”
9차례 항암치료가 끝나자 강윤구 교수는 수술을 권했습니다. 육정환 위장관외과 교수가 집도를 맡았습니다. 원래 암이 똬리를 틀었던 위와 전이된 비장 전체를 절제했고, 혹시 남아있을지 모르는 싹을 없애기 위해 췌장 일부도 떼어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수술 후 11년이 흐른 2014년, 심순복씨의 삶은 180도 달라졌습니다. 서울아산병원 위암 환우회 회장을 맡아 힘겨운 사투를 벌이고 있는 환자들에게 경험을 나눠주고, 힘을 북돋아줍니다. 음악은 단조로운 삶에 느낌표를 더해줬습니다. 심순복씨는 색소폰, 드럼, 오카리나를 배웠고, 아직 서툰 솜씨지만 연주 봉사활동에도 참여합니다.

눈에 띄게 달라진 건 식습관입니다. 심순복씨의 식탁은 채소로 채워집니다. 더 이상 맵고 짠 음식, 흰쌀밥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신선한 채소와 과일, 잡곡밥이 한 끼 식사입니다. 벌써 10여 년째 이어오는 식단입니다.

그사이 2008년 받은 정기검진에서 심순복씨는 ‘이상 없음’, ‘완치’판정을 받았습니다. 암과 공존해온 세월을 회상하며 건넨 심순복씨의 말은 강하고 단단했습니다. 쉽지 않은 길을 걸었지만, 끝내 이겨낸 그녀이기에 희망적이었습니다.
“암은 곧 죽음이라는 공식을 버리세요. 해낼 수 있다.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아무리 4기라도 말기가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치료하면 희망이 있습니다.”

 

보다 건강한 콘텐츠 제작을 위해 이 콘텐츠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을 말씀해 주세요.

뒤로가기

서울아산병원 뉴스룸

개인정보처리방침 | 뉴스룸 운영정책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