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 > 건강 정보 아내의 빨간 스웨터 2015.04.17

 

“1981년 겨울, 남편을 처음 만났어요. 소매 끝이 다 해진 옷을 입고 왔길래 그날 제가 가진 돈을 털어 남편에게 셔츠 한 벌을 선물했지요. 그해 크리스마스 날, 남편은 저를 명동에 있는 큰 백화점으로 데려갔어요. 그리고 자신의 한 달 치 월급으로 빨간 캐시미어 스웨터를 사주었죠.” 남편이 퇴원하던 날, 아내는 서랍 깊숙이 넣어 두었던 스웨터를 꺼내 입어 보았다.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지원군   

 

둘째 아이가 대학에 합격하던 날, 남편이 말했다. “이젠 당신의 꿈을 펼쳐. 지금껏 가족을 위해 살았으니 당신은 충분히 자격 있어.” 결혼 전 간호대를 졸업하고 간호공무원으로 일했던 아내는 임신과 함께 회사를 그만둬야 했다. 남편은 연애 시절 ‘어려운 사람을 도우며 살고 싶다던’ 아내의 단단하고 야무졌던 꿈을 기억하고 있었다. “늘 미안했어.” 이제라도 꿈을 펼치라는 남편의 말에 아내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눈시울만 붉혔다. 두 아이도 엄마의 꿈에 용기를 보태주었다. 가족의 응원으로 평일에는 보건소에서 금연 상담사로 일하고 주말에는 치매 전문가 공부를 했다. 든든한 남편의 외조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과정 수료 후 운 좋게 바로 보건소에서 치매 환자 교육 일을 시작했다. 치매 환자들을 만나면서 건강관리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부부는 함께 매년 건강검진을 받기 시작했다.

 

벼락 같던 30분

 

건강이란 자신하면 안 되는 것인데 살면서 한 번도 남편의 건강을 걱정한 적이 없었다. 평소 스트레칭, 산책, 등산 등으로 꾸준히 건강관리를 해 온 남편의 별명은 ‘건강 모범생’이었다. 그런데 작년 11월 남편의 심장 초음파 검사 결과를 확인한 민선양 건진교수(건강의학과 심장내과분과)의 한 마디에 주변이 순식간에 분주해졌다.

"대동맥 박리가 초음파상에서 발견됐어요.” 대동맥 박리는 심장에서 온몸으로 피를 보내주는 대동맥 일부분이 찢어져 혈관 벽 틈새로 혈액이 차면서 생기는 질환으로, 시한폭탄처럼 언제 터질 지 몰라 발견하면 즉시 수술해야 하는 아찔한 병이다.

 

 

민선양 교수는 박지나 대리(건진운영팀 검사지원 unit)를 호출했다. 박지나 대리는 서둘러 흉부외과 주석중 교수에게 환자의 상태를 의뢰했다. 간호사는 재빨리 남편을 휠체어에 태워 응급실로 옮겼다. 의료진의 부산한 움직임을 보며 아내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큰일 났구나. 살려만 주세요.’

 

남편은 평소 혈압이 높았다. 약을 먹으며 잘 다스렸던 덕분에 일상생활엔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런데 5개월 전 숨쉬기 힘들 만큼 지독한 통증이 가슴을 덮쳤다. 남편은 아내에게 증상을 얼버무렸다. ‘명색이 간호사라는 사람이 남편의 병 하나 눈치채지 못했다니 ….’ 아는 게 병이라고 불안을 떨칠 수 없었다. 바로 응급실로 옮겨진 남편의 몸에는 순식간에 십여 개의 줄이 달렸다.

 

남편의 혈압이 210까지 올랐다. 의료진들은 재빨리 약물을 주입해 혈압을 130까지 떨어뜨렸다. 이상이 발견돼 응급실로 들어가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30분도 채 되지 않았다. 주석중 교수는 혈압이 높으니 응급 수술 대신 중환자실에서 안정적인 혈압을 유지하고 추후 수술 일정을 결정하자고 했다. “수술이 진행되기 전까지 중환자실에서 지켜 드릴 겁니다.” 2주 뒤 시행한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비교적 빠르게 회복한 남편은 퇴원 후 다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보호자의 마음과 빨간 스웨터     

 

올해 2월 초 건강증진센터에 한 통의 편지가 배달됐다. 편지의 내용인즉슨 남편을 살려줘서 고맙다는 것이었다. 아내의 편지를 들고 보건소를 찾았다. “생때같던 사람이 침대에 실려 수술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바라보아야 하는 마음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힘들었어요.” 아내는 남몰래 눈물을 훔쳐야 했다. 수술을 기다리는 내내 매일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그림자처럼 남편을 챙겼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불안해할 때 힘이 되어준 건 의료진의 따뜻한 한마디였다. “꼭 지켜드릴 테니 안심하세요.” 아내는 어떤 힘든 상황에서도 곁에서 함께 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쉽게 절망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남편의 퇴원 날 이후, 아내의 마음엔 작은 변화가 생겼다. “치매 진단을 받기 위해 이곳에 오는 보호자의 마음을 진심으로 이해하게 됐어요.” 센터에 찾아온 환자만큼 보호자에게도 마음이 쓰이기 시작한 것이다. “센터에 한 남자분이 아내와 함께 찾아왔어요.” 한눈에 봐도 수척한 얼굴. 지난 겨울, 그녀가 그랬듯 보호자는 이곳에 오기까지 가슴이 벌렁거려 잠도 자지 못했을 것이며, 밥도 먹지 못했을 것이다. “보호자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데 저도 모르게 마음 꽉 잡으라고 그분을 꼭 끌어안게 되더라고요.”

 

남편이 퇴원하던 날, 아내는 35년 전 남편에게 선물 받았던 스웨터를 꺼내 보았다고 했다. “혹시 입고 있으신 스웨터가 바로 그 스웨터인가요?” 아내의 얼굴이 붉어진다. 봄이 되면 피어나는 꽃처럼 아내의 얼굴엔 환한 미소가 퍼졌다.

 

Storytelling Writer 이경진

보다 건강한 콘텐츠 제작을 위해 이 콘텐츠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을 말씀해 주세요.

뒤로가기

서울아산병원 뉴스룸

개인정보처리방침 | 뉴스룸 운영정책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