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 > 건강 정보 심장은 뛰고, 삶은 흐른다 2014.04.19

병원에 다녀온 후, 김병기 씨의 고민이 깊어졌다. 그는 동생들을 불러 어렵게 말을 꺼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형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동생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들 왜 아무 말도 없느냐?” 막냇동생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형님, 첫 번째라니요. 그 시술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누가 압니까?” 둘째가 말했다. “형님 생각은 어떠세요?” 김병기 씨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나는 의사 선생님을 한번 믿어보고 싶다.”

 

 


내 어머니의 역사

 

김병기 씨의 아버지는 학생 시절, 독립운동을 하다 유치장에 끌려가 여러 번 고초를 겪었다. 해방되던 해, 열아홉 신부를 만났다. 어머니였다. 마을 학교 선생님이던 아버지는 얌전한 사람이었다. 천성이 밝고 활달한 어머니가 셈에 서툰 아버지를 대신해 집안 살림을 책임져야 했다. 그 사이 아들 다섯에 딸 둘, 7남매가 태어났다. 맏아들이었던 김병기 씨가 입대를 하고 몇 달 뒤, 갑자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막내가 10살 때였다. 7남매는 고스란히 어머니의 몫이 되었다. 고독한 세월 견뎌가며 키운 자식들은 제각각 가정을 꾸려 어머니 품을 떠났다.

 

어느 날 갑자기 어머니가 가슴 통증을 호소했다. “얘… 날카로운 게 가슴을 찌르는 것 같구나.” 가슴이 조여와 숨쉬기 힘들다는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갔다. 심장 정밀 검사 후 밝혀진 병명은 판막 협착증. “심장판막 교환 수술을 해야 하는데 워낙 고령이시라…” 수술 외엔 대안이 없다면서도 나이가 많아 수술은 위험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시간이 갈수록 어머니의 걸음은 더디어졌다. 여든다섯.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인생이었다. 세월의 흐름을 거부할 순 없지만, 아직 어머니를 보내고 싶진 않았다.

 

어머니의 병세가 점점 나빠졌다. 희망을 놓지 않았던 김병기 씨.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찾아온 곳이 서울아산병원이었다. 첫 진료시간, 김영학 교수는 포기 대신 희망을 말했다. 일단, 먼저 하나씩 해결하자고 했다. 좁아진 동맥 혈관을 넓히기 위해 스텐트를 끼웠다. 그다음은 판막이었다. 수술을 거부하는 가족들에게 김영학 교수는 망가진 판막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새 판막’을 집어넣는 새로운 시술법에 대해 이야기를 해 주었다. 국내에선 지금껏 한 번도 시도된 적 없는 시술이라는 말에 덜컥 겁이 났다. 기쁨과 절망이 교차했다.

 

‘TAVI’의 시작

 

“심장 판막은 왜 스텐트처럼 시술하지 못하지?” 서울아산병원 심장내과 팀은 고민에 빠졌다. 심장에서 출발한 피가 한 방향으로 잘 흘러가도록 도와주는 판막에 이상이 생기면 가슴을 열어 심장판막을 교체하는 수술을 했다. 나이가 많은 고령 환자에겐 수술 대신 약물요법을 권했다. 수술로 자칫 생명이 위험해 질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약물치료의 경우 1년 사망률이 50%에 가까웠다. 의료진은 2년여 간의 노력 끝에 수술 부담을 줄여주면서도 환자의 생존율을 높일 수 있는 치료 방법을 찾았다. 바로 TAVI (중재적 판막 치환술) 였다.

 

2010년 1월 15일, 드디어 식품의약품안전청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중재적 판막 치환술’을 승인한다는 것이었다. 십여 명의 후보 중 여러 검사를 거쳐 김병기 씨의 어머니가 가장 적합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국내 TAVI 시술 첫 번째 환자가 정해지고, 시술일이 다가올수록 심장병원 의료진의 손길도 바빠졌다. 드디어 2010년 3월 29일, 시술실 안에서는 가벼운 긴장감이 흘렀다.

 

첫 시술을 위해 컬럼비아 대학병원에서 온 두 명의 의료진이 참관했다. 오전 8시 5분. 시술이 시작되었다. 박승정 교수는 들고 있던 7mm의 주사를 환자의 넓적다리 피부에 찔러 넣었다. 주사를 통해 미리 만들어 놓은 인공 판막이 혈관으로 들어갔다. 혈관을 타고 올라간 인공판막이 망가진 판막을 밀어냈다. 그 자리에 ‘새 판막’이 안착하는 순간, 환호성이 터졌다. 새 판막이 부풀어 오르고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것을 확인한 의료진은 그제야 함께 기뻐했다. 국내 최초 TAVI 시술이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이후 4년이 지났다. 김병기 씨 부부는 갑자기 찾아온 손님을 아주 반갑게 맞아주었다. 은퇴 후 지방에서 농사를 짓느라 주말에만 올라오는 김병기 씨 대신 며느리가 어머니를 돌보며 함께 살고 있었다. “내가 장남이니까 결혼하고 지금까지 우리가 모시고 살았지요.” 가슴이 아프다는 어머니를 모시고 응급실에 쫓아다닌 것도, 기침 소리에 노심초사 병원에 모시고 다니던 것도 사실 며느리였다. 젊은 시절 맞벌이 부부였던 큰아들 내외를 대신해 살림을 돌봐온 어머니는 이제 증손주 재롱 보는 재미에 푹 빠져 살고 있다고 했다. “어머니는 4살 된 아이를 업고 다닐 정도로 건강해지셨어요. 설에 며느리들이랑 팔씨름을 했는데, 어머니를 이긴 사람이 없을 정도예요. 하하.” 아흔을 바라보는 그의 어머니에게는 꿈이 있다. “아들딸 다 건강하게 잘 살고, 우리나라 통일되는 게 내 소원이요.” 평소 가족들에게 차마 내색하지 못했던 속마음도 털어놓는다. “우리 어머니가 92세에 돌아가셨거든… 나도 그때까진 살고 싶어.”

 

2010년 3월, 국내 첫 시술이 성공이래 현재 112명의 환자가 TAVI시술을 받았다. 평균 나이 78세. 기적과 같은 도전의 성공. 시작을 위한 출발점에는 의료진의 열정 그리고 그 열정에 믿음을 보내준 환자와 그의 가족들이 있었다. 김병기 씨 가족의 도전이 없었더라면 다음 도전 또한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도전과 열정으로 점철된 역사의 또 다른 주인공은 바로 이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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