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 > 건강 정보 함께라는 위로 2020.10.05

 

고시원의 작은 방에는 아무 빛도 들지 않았다. 영만 씨는 숨쉬기 힘든 흉통을 참아내며 두 달여를 가만히 누워있었다. 예순이 다 되어 생전 처음 병원에 갔던 날, 간단한 진료와 검사에 20만 원 가량 들었다. 오래전 주민등록이 말소되는 바람에 건강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 장, 두 장 서랍에 모아둔 뭉칫돈은 병원에 몇 번 들른 사이에 모두 사라졌다. 기초생활수급자로 확정될 때까지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이러다 죽어도 어쩔 수 없지···.” 혼잣말이 씁쓸하게 입안에서 맴돌았다.
 

속수무책의 나날
아홉 살에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다. 가난 때문이었다.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가락시장에서 짐꾼으로 35년을 보냈다. 경매 후에 나온 20~30kg의 짐들을 트럭에 싣는 일이었다. “가진 것도, 배운 것도 없으니 그날 벌어 그날 쓰는 일밖에 할 게 없었어요. 그래도 시장에선 날쌔다는 소문이 나서 찾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튼튼한 두 팔과 두 다리만 있으면 굶어 죽진 않겠구나! 자신했죠.”3년 전이었다.
들이마신 찬바람이 몸에서 빠져나가지 않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곤 조금만 걸어도 심장이 찢어질 듯 아팠다. 밤이 되면 통증은 더욱 심했다. 참을수록 곧 큰일이 나겠다는 위기감만 더해졌다. 동네 병원에선 몇 번의 검사 끝에 큰 병원에 가야 한다고 했다. 돈은 이미 떨어졌는데 말이다. 일도 할 수 없는 난감한 상태가 되자 시장 사람들이 조금씩 병원비를 모아 주었다.
“고맙소, 정말 고마워.” 뜻밖의 도움에 어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겼다. 일단 동사무소에 가서 주민등록 정정 신고를 하고 기초생활수급 신청을 했다. 그리고 의료비 수급이 확정될 때까지 진통제만 삼켰다. 더 이상 버티기 힘들어 응급차를 부르던 순간에도 빨리 몸이 나아야 다시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뿐이었다. 돈과 일, 건강 셋 중에 뭐가 먼저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인생의 끝을 기도하다
심장내과 이상언 교수는 확장성 심근병증 진단을 내렸다. 심장 근육의 이상으로 심장이 확장되고 기능은 현저히 떨어지는 질병이었다. 약물치료를 1년 2개월간 이어갔지만 역부족이었다. 사회복지팀의 지원을 받아 심장박동기도 넣었지만 효과는 없었다. 통증이 느껴질 때마다 이젠 정말 포기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 교수는 심장이식을 받아 보자며 새로운 설명을 이어갔다. ‘나 하나 살리려고 애쓰고 있구나!’라는 마음이 전해졌다. 설명을 더 들을 것도 없었다. “교수님이 시키는 대로만 하겠습니다.” 이식을 결정하고 4월에 입원했다. 어떤 환자에겐 가족들이 수시로 찾아왔다. 또 어떤 환자는 고통을 참지 못해 고함을 치거나 누운 채로 대변을 보기도 했다. 간병인도 없이 혼자 지키는 병상이 외롭고 괴로웠다. 밥을 한 숟가락만 떠도 토하기 일쑤였다. 약을 먹으면서 생긴 당뇨로 식단은 엄격했다. 통원 치료를 받고 싶다는 간청에 “언제 이식받을 수 있을지 모르니까 조금만 참아보세요. 빨리 이식받을 수도 있고요!” 희망을 주려는 대답이 영만 씨에겐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간밤에 조용히 숨이 멎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며 잠을 청했다. 이번 생에 아쉬울 것이 없는 데다 내일 당장 사라진 대도 세상은 모를 것만 같았다.

나를 걱정하는 누군가
사회복지팀의 박종란 차장이 병실로 찾아왔다. 그를 방문한 첫 번째 손님이었다. “컨디션은 어떠세요? 다른 걱정은 말고 몸만 생각하세요. 치료비 모두 지원받을 수 있도록 열심히 준비하고 있어요.” 걱정하며 지켜봐 주는 이가 있는 것보다 더한 위로는 없었다. 영만 씨는 얼른 나아서 은혜를 갚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6월의 어느 날, 기다리던 연락이 왔다. “김영만 님과 조건이 맞는 공여 심장을 확보했습니다. 지금부터 금식하시고 자정에 이식 수술을 진행하겠습니다.” “예? 농담하지 마세요. 심장을 기다리는 환자가 이 병실에만 몇 명인데 제가 받을 수 있나요?” 곧 병실로 찾아온 이 교수를 보고서야 농담이 아니란 걸 알았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살고 싶다는 속마음을 토해내듯 눈물이 쏟아졌다. 기적이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이식 수술 후 특별한 거부 반응이 없었다. 의료진 모두 놀랄 정도였다. 어쩌다 한 번씩 심장이 쿵쿵 뛰었지만 차분히 있으면 금방 지나갔다. 그마저도 한두 달이 지나자 사라졌다. 영만 씨는 기쁜 소식을 사회복지팀에도 전했다. “제가 대체 무슨 복을 받은 건지…. 은혜 갚을 일이 있으면 뭐든 할게요.” 함께 기뻐하던 박 차장은 퇴원 후 안정된 집을 얻는 것까지 돕기로 했다. “그때 알았어요. 서울아산병원 사람들이 일로만 환자를 대하는 게 아니라는 걸요. 덕분에 제가 이렇게 살아 있는 거예요. 그 고마움을 어떻게 다 말로 해요….” 병원을 나서는 길에 영만 씨의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누구보다 튼튼하던 다리 근육이 병상에 있으면서 모두 빠진 것이다. 이 교수가 병동을 가볍게 산책하는 것과 일상에서 몸을 쓰는 건 많이 다를 거라고 예고한 대로였다. ‘내 한 몸 지탱하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이었나?’ 조금 당황했지만 절망적인 건 아니었다. 혼자 넘어진 순간에도 영만 씨의 손을 찾아 잡아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다시 시작하겠다는 단단해진 마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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