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지긋하고 인생 경험이 많은 어른들의 경우에는 남들 돕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바친 주인공, 장발장이나 자식을 위해 몸까지 파는 비련의 여인, 판틴에게 더 감정이입을 한다. 반대로 젊은 사람들일수록 프랑스 혁명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젊은이들의 이야기에 더 많은 감동을 받는 경향이 있다. 나이가 들수록 '애처롭지 않은 인생이 없다'는 걸 이해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불행보다는 희망을 먼저 보는 젊은이들의 특징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흰 머리카락이 살짝 살짝 보이는 서글서글한 인상의 육정환 선생님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져보았다. 대답은 의외였다. 선생님은 가난한 시민들이 혁명을 위해 들고 일어나는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다는 것.
'마음이 젊은 분이구나'라는 첫인상과 함께 육정환 선생님과의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선생님이 아직 학생이던 시절, 위암은 한국인이 제일 두려워하는 암이었다. 전 세계에서 위암 발병률이 가장 높은 나라가 한국이었고, 지금처럼 의술이 발달되지 않아, 많은 환자들이 위암으로 목숨을 잃었던 시기였다. 당연히 위암 전문 의사도 많이 필요하던 시대. '수술을 하는 외과의사는 힘드니까 다른 과를 가야지', '선진국으로 다가갈수록 성형외과나 피부과가 인기를 끌겠지.' 이런 똑똑한 계산을 했던 학생들과는 달리, 선생님은 '제일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는 이유가 위암이니, 위암을 전공해야한다.'는 순진한 책임감과 사명감에 위암 전문 외과의사가 되었다고 하신다. 그 선택의 결과, 당연히~ 인턴과 레지던트를 남들보다 훨씬 힘겹게 보내야 했다. 거의 병원에서 살다시피 생활한 게 아니라, 진짜로 병원에서 살며 치열한 젊은 시절을 보내야 했다고.
그래서 의대생들은 동아리활동을 열심히 하게 된다. 의대 안에 있는 미술, 음악, 야구 동아리들이 잘 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의대생들의 보상심리 때문이라고. 그렇다면 육정환 선생님은 어떤 동아리 활동을 하셨을까? 놀랍게도 "보디빌딩 동아리"였다. 운동 기구를 이용해서 온 몸의 근육을 조각처럼 만들어가는, 바로 그 보디빌딩이 선생님이 대학 6년, 인턴, 레지던트 기간에 몰두했던 취미생활이었다. 선생님은 소위 말하는 "몸짱" 의사 선생님이었던 것. 머리를 비우고 몸 만들기에만 몰입하다보면, 공부 스트레스도, 무시무시한 위암에 대한 스트레스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다고 한다. 선생님은 보디빌딩으로 마음 수련을 했었던 것. 그 몸매 좋던 시절, '사진을 많이 찍어뒀어야 했는데, 그 생각을 못 한 게 아쉽다'는 말씀을 하시는 선생님의 모습은, 낯설고도 신선했다. 이렇게 지적인 선생님이 이렇게 육체적인 말씀을 하시다니... 이제는 나이 지긋한 작은아버지가 삼촌이었던 시절이 불현듯 떠오르는 때처럼, 선생님이 왠지 정답고 친숙해지는 순간이었다.
나날이 치솟던 위암 발병률은 몇 년 전부터 정체기를 맞았다고 한다. 게다가 간암, 췌장암, 난소암 같은 암에 비하면 위암은 '쉬운 암'이라는 인식까지 생기게 됐으니, 짧은 시간동안 위암은 참 많이도 순해졌다. 하지만 선생님은 위암에 대한 경계를 놓지 않고 계셨다. 다른 암들에 비해 수술 뒤 생존율이나 완치율이 높은 편이지만, 환자들이 겪어내야 하는 고통으로 따지면, 위암이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 특히 밥 한 숟가락을 소화시키기 위해 하루 종일 씹어야 한다거나, 안 되는 체력에 열심히 먹어줬는데도 기력을 회복하지 못하는 환자들이 느끼는 무력감은 안 당해본 사람은 모르는 고통이라고 한다.
수술 후에도 회복과 관리 기간이 긴 만큼, 그 사이 합병증이 생길 위험도 있고, 전통적인 절개법 대신 복강경수술이 보편화 되는 등 수술 방법도 나날이 새로워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생님의 올해 목표는 환자뿐만 아니라, 의사도 웃는 병원을 만드는 것! 위암은 이제 '다 잡은 암'이라고 표현해도 될 만큼 의술이 발달했고, 환자들의 만족도도 높아졌다. 하지만 환자와 함께 의사도 맘 편하게 웃을 수 있으려면 환자가 수술을 받고 병원 문을 나서는 순간까지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된다는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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