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아산인 이야기 가족을 지키는 아빠의 마음으로 2014.07.14

가족을 지키는 아빠의 마음으로 - 소아종양혈액과 임호준 교수

 

뇌출혈로 응급실로 실려온 아이. 원인은 급성전골수성백혈병이었다.
부모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라며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며칠 동안 밤을 새우며 아이에 매달렸다. 기적처럼 아이는 점점 의식을 되찾았다. 살아나는 아이의 모습에 곁을 떠나지 못하고 창백하게 말라가던 부모도 함께 살아났다. 그는 그때 알았다. 아이는 부모가 살아가는 이유라는 것을…


그가 워커홀릭이라 불리는 이유

소아종양혈액과 임호준 교수. 함께 근무하는 직원들은 그를 '워커홀릭'이라고 부른다. "휴일이나 명절도 없이 매일 병원에 나오세요."
"집에서도 쉬지 않고 일을 하시는지 AMIS로 환자 검사 결과를 확인하고 저희에게 다음 업무에 대해 전화하세요."
이렇게 병원에서 대부분 시간을 보내다 보니 그를 의사 이상으로 의지하는 환자도 많단다.

"교수님 환자 중에 잦은 통증으로 진통제 의존도가 높았던 환자가 있었어요. 약물을 줄여야 했지만 환자가 완강히 거부했죠."
약을 줄일 수 없다고 버티던 환자. 몇 시간 뒤 약을 줄일 테니 대신 임호준 교수의 사진을 달라던 환자는 그의 사진을 자신의 눈길이 닿는 곳마다 붙여놓았다. 임호준 교수가 진통제였던 것일까. "열심히 하시니까 그런 모습을 보면서 환자도 희망을 얻지 않았을까요." 상황이 이렇다 보니 그 역시 늦은 밤까지 병원을 떠날 수가 없는 생활이 반복되고 있다.
연결고리처럼 이어지는 이것이 그가 워커홀릭이라 불리는 이유다.


국내 소아 반일치 조혈모세포 이식을 이끌다

 

지난 40년간 소아암 치료는 큰 발전을 이뤘다. 80년대만 해도 사형선고나 다름없던 백혈병이 이제는 80% 이상 완치된다고 하니 말이다. 특히, 부모와 형제간 유전자형이 절반만 일치해도 이식이 가능한 반일치 조혈모세포 이식 분야에서의 성과는 그 의미와 앞으로 발전에 더욱 주목할 만하다. 이 방법이 성공적으로 체계를 잡아 표준화된 치료법이 될 수 있다면 백혈병과 중증 재생불량성빈혈 같은 난치성 질환의 환자들이 적합한 공여자를 만날 때까지 겪어야 하는 어려움 없이 새 삶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이 임호준 교수가 반일치 조혈모세포 이식 연구에 힘을 기울이는 이유이다.

서울아산병원 소아종양혈액과에서는 지금까지 50명이 넘는 아이들에게 반일치 조혈모세포를 이식해 80%의 완치율을 기록하고 있다. 2002년 3개월간 독일 훔볼트 대학병원에서 처음 조혈모이식을 접하고 돌아온 임호준 교수는 조혈모세포 이식술로 더 많은 환자에게 희망을 줄 수 있을 거란 기대를 가지고 2003년 미국 프레드 허친슨 암 연구 센터로 1년간 연수를 떠났다. '리서치'가 아닌 '직접 환자들을 만나 진료를 보고 시술을 하겠다'는 그의 요청에 그곳 교수들은 의아해 했지만, '국내 환자들을 위해 실제로 적용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고 싶다'는 그의 진의를 파악하고 물심양면 도움을 주었다. 몸으로 직접 부딪히며 조혈모 이식수술의 선진 기술을 국내에 옮겨 온 그는 2004년 처음으로 중증 재생불량성빈혈로 생사의 갈림길에 선 아이를 치료하면서 본격적으로 반일치 조혈모세포 이식 연구에 뛰어들게 되었다. 그의 노력은 멈추지 않았다. 2008년 면역 부작용을 줄이기 위한 새로운 방법을 찾아냈다. 그 이후 현재까지 18명의 중증 재생불량성 빈혈 아이를 수술해 100%의 완치율을 기록하고 있다.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주목할만한 성과다.


일과 삶의 경계에서

1995년 한양대병원에는 국내 백혈병 치료의 선구자라 불리는 故 이항 교수가 있었다. 병원은 전국에서 몰려든 환자로 매일 북새통을 이뤘다.
당시 그곳에서 소아종양혈액과 전임의 과정을 밟고 있던 임호준 교수는 병원에서 살다시피 지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턴가, 가슴에서 짓누르는 듯한 아픔이 느껴졌다. 매일 마주치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집에 있는 아이들의 얼굴이 떠오른 것이었다. 누군가의 행복한 가정을 위해 당연하게 미뤄 왔던 내 가족과의 시간. 그날 이후 주말이면 아이들을 차에 태우고 전국을 돌아다녔다.
"어느 날은 새벽 기차를 타고 아이들과 정동진에 갔어요. 비가 와서 결국 해가 뜨는 건 못 봤지만 가는 동안 아이들과 많은 대화를 나눴지요."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시절 '반짝'의 추억은 이후 고된 병원 생활을 버틸 수 있게 한 영양제가 되었다. "그 시간을 통해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더욱 깊이 알게 됐어요. 행복한 가정의 중심에는 아이들이 있다는 것도요."
아파 봤던 사람이 아픈 사람의 마음을 더 잘 알듯 아이들과 함께했던 시간은 아픈 아이를 둔 부모의 마음을 좀 더 깊이 헤아리도록 했다.
"어릴 적엔 기차를, 조금 더 커서는 고래를 좋아했고, 중학교 때부턴 비행기에 관심이 많았어요. 결국 대학도 우주항공을 전공으로 갔고요." 워커홀릭이라고 불리는 아버지는 아들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줄줄이 꿰고 있었다. 어릴 적 아이들과 함께 여행을 다니며 축적해 놓은 추억이 지금 그가 힘들 때마다 꺼내어 쓰는 에너지라고 말하는 임호준 교수.


아이들을 떠올리는 그 순간만은 그도 그저 아버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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