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아산인 이야기 제 꿈은 왕진가방을 든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2014.07.14

제 꿈은 왕진가방을 든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 정형외과 이종석 교수

 

'마교사전'이라는 책이 있다.


중국, 마교 지방 사람들의 사투리를 그 단어가 생긴 유래와 함께 설명해놓은 사전 형식의 소설이다. 책에는 18세 이전에 죽은 사람은 귀생(귀한 인생), 반면에 천수를 다 누리고 죽은 사람의 인생은 천생(천한 인생)이라고 설명한다.
사람이 한 평생을 살다 보면 산전수전 다 겪으며 별별 때가 다 묻기 마련인데, 그렇게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진 다음에 죽는 건 천한 삶을 살다가 가는 것이라는 마교 사람들의 가치관을 담은 단어가 바로 천생이다. 반대로 어린 나이에 요절하는 건 사람의 고귀한 품성을 더럽히지 않고 가는 것이니 귀한 인생을 살다간 것이 된다.


뼈에 생기는 암, 골육종. 뼈에 생기는 병이니, 한참 크는 성장기 아이들에게서 더 자주 발생한다.

암은 젊은 사람들일수록 더 치명적인 병. 자연스럽게 사망률도 높아진다. 꿈이 많을 나이인데, 꽃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저 세상으로 가는 어린 환자들을 대할 때마다 선생님은 마음이 아프다 못해 썩어가는 심정이다. 그럴 때마다 선생님은 '귀한 사람을 하늘이 먼저 알아보고 데려가시는 거겠지. 저 곳에서 더 큰일을 할 사람이어서 먼저 가는 거겠지...' 이런 생각들을 하며 마음을 달래곤 한다. 마교 사람들 역시 그런 안타까운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기 위해 요절이라는 말 대신, “귀생”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독특하게도 정형외과 안에서도 종양이라는 특수 분야를 전공으로 삼게 된 선생님

 

하지만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자타가 공인하는 공학 꿈나무였다. 워낙 만지고 고치고 조립하는 걸 좋아했던 선생님. 어른들도 집안에 물건이 고장 나면 이종석 선생님을 불러 수리를 부탁했다고 하니, 손재주는 타고난 것임에 틀림없다.
헌데, 선생님이 공대에 진학하겠다는 꿈을 바꾸게 된 계기... 사촌 형님이 연탄가스 중독으로 대학 1학년 스무 살 나이에 세상을 뜨면서였다.
돌아가신 형님은 집안 사정으로 작은 아버지가 선생님이 사는 부산 큰집으로 아들의 공부를 위해 보내면서, 1년 넘게 한방을 쓰던 사이였다.
예민하던 사춘기 시절에 그런 일을 겪다 보니, 삶과 죽음이라는 미지의 일을 담당하는 의사에 호기심이 생겼다고 한다.
하지만 공학자가 되고 싶던 마음과 타고난 손재주를 버릴 수 없어서, 나름 절충한 전공이 정형외과. 부러지고 비뚤어진 몸을 바로잡아 고치는 직업이니, 의사 중에서도 가장 엔지니어에 가까운 분야가 정형외과다.


정형외과는 한마디로 답이 있는 과다.

뼈가 부러지면 다시 붙이면 되고, 근육이 틀어지면 제자리를 잡을 때까지 잘 묶어놓으면 된다. 정 안되면 인공관절 수술도 있다.
헌데, 선생님이 암이라는 상대를 만나면서 문제가 생겼다. 긁어내면 다시 자라나고, 싹까지 없애려고 잘라내면 어느새 다른 곳에 전이가 된다. 게다가 어린 환자들이 아파하는 모습을 보려니, 더 마음이 아프고, 의사로서 좌절감도 컸다고 한다. 잊어보려고 운동을 해봐도, 헉헉대며 땀을 흘리면서도 머릿속으로는 환자 걱정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상황..
선생님이 스트레스를 이기기 위해 몇 년간 고심하다 찾아낸 방법이 있다. 바로 환자 생각을 본격적으로 하는 것이다. 조용하게 산책을 하면서 환자에 대해 이런 점, 저런 점을 고민하다 보면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냉정함도 찾을 수 있고, 그러면서 새로운 해결책도 나오더란 게 이종석 선생님의 말. 헌데, 그렇게 산책을 하면서 깨달은 점은 환자를 위한 해결책이 꼭 의학적인 부분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따뜻한 격려의 말이 병을 이겨내는 데 힘이 되기도 하고, 병원비 때문에 어려워진 가정 형편을 도와줄 방법을 찾아내는 게 치료보다 더 급한 때도 있다. 골육종 환자를 정형외과 안에서 다 볼 수도 없다. 어떨 땐 종양내과, 방사선종양학과, 흉부외과 의사에게 환자를 의뢰하는 게 제일 좋은 해결책이 되기도 했다. 완벽주의자였던 선생님은 그렇게 서서히 병보다 환자를 먼저 보는 의사로 변해가고 있다고 한다.


요즘 선생님은 새로운 재밋거리가 하나 생겼다. 바로 장래 희망이란 주제로 공상을 펼치는 일이다.

어른들의 장래희망은 여행이란 말도 있듯이 은퇴 후, 선생님의 바람도 여행을 하는 것이다. 헌데, 선생님의 여행은 여행 가방이 아닌, 왕진가방을 들고 가는 여행이다. 빳빳한 가운을 입고 전문분야를 진료하는 의사가 아닌,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 사람들 속에 섞여서 진료도 하고 봉사도 할 수 있는 삶이 이종석 선생님이 생각하는 은퇴 후 모습이다. 앞으로 몇 십 년 뒤, 왕진 가방을 들고 개울을 건너고 언덕을 넘어가는 사람이 있다면, 환자를 보고 돌아가는 이종석 선생님일 것이다.


지금은 누가 들을까 봐 부끄러워서 혼자 있을 때만 흥얼거려본다는 노래를, 그때가 되면 온 산이 울리도록 불러제끼는 유쾌한 노신사가 돼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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