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강연에서 지금까지 배울 수 없었던 것들을 배웠습니다. 큰 수확을 얻고 돌아갑니다. 조만간 서울아산병원에서 당신의 수술을 직접 보고 싶습니다.” (토니 우, 대만)
“2년 전 일본 오카야마에서 만났던 의사입니다. 우리 병원에서도 이제 막 코성형수술을 시작했습니다. 앞으로도 지도 바랍니다.”(이게다 히로끼, 일본)
장용주 교수는 코의 모양에 변형이 있거나 비중격(코 안을 좌우로 나누는 벽)이 휜 코, 내부구조의 손상이 있는 빈코 증후군과 같이 코 구조 변형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모양적, 기능적 이상을 치료하는 이비인후과 의사다. 그는 새로운 수술법으로 이 분야의 치료 영역을 넓혔다.
그의 책장에 놓인 편지 대부분은 아산 코성형 심포지엄과 해외 초청강연에서 만난 의사들로부터 받은 것이다.
장용주 교수는 2003년 아산 코성형 심포지엄을 만들었다. 올해로 12회째를 맞는 이 행사를 위해 매년 50여 명의 해외 의사들이 찾아온다. 특히 일본에선 매년 꾸준히 10여 명의 의사가 참석한다. 2010년엔 아산 코성형 심포지엄에서 만난 일본 교수들이 현지에서 스터디 모임을 시작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그가 하는 코성형 수술은 휜 코나 주저앉은 코, 매부리코, 이전의 코성형 수술 부작용으로 심각하게 망가진 코와 같이 변형된 코와 그에 따른 내부 기능 이상을 동시에 치료한다. 지금까지 약 40여 편의 관련 논문을 국제 학술지에 발표했고, 10여 년간 20개국에서 90여 번의 해외초청강연을 했다.
2006년과 2013년에는 코성형술에 관한 국·영문 교과서도 집필했다. 이 분야에서 그의 활동은 독보적이다.
그는 늘 후배들에게 말한다.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자신을 믿고 내면의 소리를 따라가라고. 그러면 꿈을 이룰 수 있다고.
인턴 시절 진로를 두고 누구보다 치열하게 고민했다.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과는 어딜까?’ 곰곰이 생각을 곱씹은 후에 선택한 곳이 이비인후과였다. 이비인후과 레지던트 시절 민양기 교수(서울의대 이비인후과)의 코 내시경 시술을 보며 코 전문의의 꿈을 키웠다.
그 당시 이비인후과 전공의들은 귀, 코, 입 파트 중 하나에만 집중할 수 없던 분위기였다. 주변 환경도 친절하지 않았다. “지도 교수님의 귀 관련 연구 리서치를 담당하게 되면서 계획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마음의 소리를 깨운 건 환자였다. 코 변형으로 코 막힘 등의 문제가 생긴 환자들이 외래에 찾아왔다. 약물치료나 축농증, 비중격 수술을 통해 숨을 시원하게 쉴 수 있게 해주었지만, 환자들은 치료 후에도 여전히 사람 만나기를 기피했다. 절반의 완성. 자신감을 회복하지 못하는 환자들의 모습이 안타까웠다.
“기능과 미용, 모두를 만족시키기 위한 수술법 개발이 필요했습니다.” 코에 대한 해부학적 이해가 깊어야 가능한 수술이었다. 당시 코성형술의 선두는 미국이었다. 2001년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데이비스캠퍼스(UC Davis)로 연수를 떠났다. 큰 기대를 품고 떠난 연수였지만, 서양사람들과 아시아 사람들의 코는 구조적으로 큰 차이가 있었다. 새롭게 시작해야 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2002년 말 서울아산병원 이비인후과에 합류했다. “서울아산병원에서는 한 분야에 집중해 연구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마음껏 코만 볼 수 있었죠.” 전국에서 찾아온 다양한 코 변형 환자를 만나면서 그들이 무엇이 불편한지를 묻고 또 물어 흉부 연골을 이용한 기능적 코성형 수술법을 개발했다. 새로운 길. 성공만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3차원 구조의 코는 회복되는 과정에서 모양이 변하기도 했다. 만족하지 못하고 돌아가는 환자를 보면 마음이 아팠다.
그럴수록 환자의 삶에 더욱 집중했다. 해가 거듭될수록 결과가 좋아졌다. 기뻐하는 환자들의 모습은 도전에 따른 보상이었다. “어려움은 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상황에 사로잡히기보다는 왜 환자가 만족하지 못했는지 고민하며 같은 과정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집중했습니다. 그러면 반드시 더 좋은 방법의 실마리가 보였습니다.” 문제를 해결해 가는 과정 가운데 그는 기술적으로 더욱 성장했다. 그리고 2006년 자신의 수술 경험을 토대로 코성형 교과서를 집필했다. “궁금한 게 있는데 참고할 만한 문헌이 없으니 ‘내가 해 보자’해서 달려들었습니다. 후배들이 코성형하면 장용주라고 떠올려줬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고요.”
장용주 교수의 어린 시절 꿈은 세계 여행가였다. 그 시절 일반인들은 가기 어려웠던 세상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던 한국 최초의 세계 여행가 김찬삼 교수를 보며 키운 꿈이었다. “TV에 그가 나오는 날이면 세계 지도를 닳도록 쳐다보며 잠들지 못했어요. 언젠간 새로운 길을 개척해 세계를 누비며 살고 싶다는 막연한 꿈도 가졌죠.”
세월이 흘러 그는 탐험가 대신 의사가 되었고, 지도 대신 메스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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