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아산인 이야기 천천히 다져온 오늘 2020.07.21

천천히 다져온 오늘 - 종양내과 정재호 교수

 

인턴 때였다. 젊은 여성이 가슴을 움켜쥐고 응급실에 도착했다. 손가락 사이에선 두꺼운 거즈와 화장지로도
막지 못한 진물이 흐르고 있었다. 막연한 두려움에 유방암을 방치해온 것이다. 그 사이 암은 빠르게 퍼졌고
괴사한 자리에선 진물과 냄새가 났다. 상처를 본 순간 그동안의 괴로움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암을 앓아도 삶의 질을 높일 순 없을까. 그 고민은 종양내과 의사가 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어려운 숙제를 풀어가다

정재호 교수는 유방암, 담도암, 췌장암에 대한 약물치료를 세부 전문분야로 하고 있다. 전이암 환자들은 완치도 되지 않는데
항암 치료가 무슨 소용이냐고 묻곤 한다.
그러면 더 오래 사는 게 첫 번째, 같은 기간을 살아도 삶의 질을 높이는 게 두 번째 이유라고 답한다.

아무리 좋은 진통제도 암을 이기기엔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환자마다 어떤 약이 효과적인지, 용량을 어떻게 조절할지 항암 치료의
득실을 예민하게 따져 관리하는 것이 정 교수의 숙제다.
요즘은 급속히 진행되는 유방암 환자군을 모아 그 특성을 분석하고 항암제의 내성을 극복할 방법을 찾고 있다. 1차 치료에 실패한
폐경 전 여성 유방암 환자를 위한 항호르몬 치료병합요법 연구로 지난해 유럽종양학회에서 메리트 어워드를 수상하기도 했다.

종양내과에선 암의 시작부터 끝까지 전체 치료 과정을 돌본다. 항암 치료의 부작용을 파악하려면 환자를 예민하게 살펴야 한다.
환자가 반복적인 통증을 호소해도 검사 결과에는 드러나지 않을 때도 있다.

“기억에 남는 환자는 모두 적어둡니다. 비슷한 케이스가 쌓이면서 조금 더 보이는 게 많아졌죠. 좋은 항암제를 선택하는 것만큼 환자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게 중요하다는 걸 절실히 느낍니다.”

 

부족함에서 나오는 힘

 

어린 시절 유난히 잔병치레가 잦았다. 첫돌도 병원에서 보내야 했다.
어머니는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한숨이 나온다고 한다. 다행히 병원 생활에서
얻은 것도 있었다.

“건강하게 자라서 의사 선생님처럼 훌륭한 어른이 되어야지!”라는 다독임이
성장기의 자양분이 되어 의사의 길로 들어섰다.


전공을 선택할 때에는 종양내과 이재련 교수의 설명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종양내과를 막연히 나쁜 소식만 전하는 곳이라고 여기던 차였다. 그러나 이 교수는
3차 병원의 종양내과 의사라면 표준 치료를 잘하는 건 기본이고 새로운
표준 치료를 만들어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 관점에서 보니 발전 속도가 굉장히 빠른 분야였습니다. 뭔가 해볼 게
많겠다는 기대감이 생겼습니다. 암 환자에게 어떤 치료가 효과적인지 고민하고
결정하는 모습이 악단의 지휘자처럼 근사하게 보이더라고요(웃음).”


그러나 서울아산병원에는 뛰어난 두뇌와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가진 이들이
가득했다. 전공의를 마칠 때까지 이곳에서 교수가 되리란 기대는 전혀 하지 못했다.
 

 

“제 장점은 성실함뿐이었어요. 차트로만 본 환자는 기억을 잘 못 해서 수시로 환자를 찾아갔습니다. 직접 환자를 보면 정확한 판단이
섰고요. 지금도 항암주사실에서 환자 상태가 좋지 않다는 연락을 받으면 직접 가봅니다. 항상 부족하다는 고민이 저를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 것 같습니다.”

 

 

함께 치료한다는 믿음

정 교수는 조심히 아버지 이야기를 꺼냈다. 아버지도 전립선암 환자였다.

“보호자들이 ‘교수님만 믿어요’라고 말할 때의 심정을 알겠더라고요. 한계가 보일수록 간절함도 커졌습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한동안 환자들에게 나쁜 소식을 전하기 어려웠다.

작은 가능성이라도 보이면 “힘들겠지만 완치도 가능합니다”라는 말을 건넸다. 시간이 흐르고 호전된 환자마다 “치료할 수 있다는
교수님의 한마디에 버틸 수 있었습니다”라며 감사해했다.


그러나 항상 긍정적인 상황일 수만은 없다. 무엇이든 있는 그대로 알리는 것이 치료 원칙이다. 환자 스스로 자신의 상태와 치료 과정을
잘 알아야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비유와 메모를 통해 쉽고 자세히 설명한다.

“제가 어떻게 치료한다고 했죠?”라고 역으로 질문할 때도 많다. 암의 진행 상황을 환자에게 말하지 말아 달라는 보호자의 요청엔
거절 의사를 밝힌다.

“환자와 의사는 같은 곳을 보며 가야 합니다. 그래야 험난한 여정을 보다 빠르고 쉽게 지날 수 있을 테니까요. 최선의 치료는 가치관에
따라 모두 다르게 판단할 겁니다. 하지만 의사와 환자가 함께 치료해 나간다는 믿음이 그 출발선이라는 건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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