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뉴스룸 칼럼 [나를 있게 한 환자] 평생 지속 가능한 이유 2023.06.30

 

 

인턴 수련을 시작한 지 한 3개월쯤 됐을 때였다. 그날도 아침은 고사하고 커피 한 잔도 제대로 못 마신 채 병동 환자들의 드레싱을 하고 있었다. 한창 드레싱에 몰두하던 중 내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어찌나 컸는지 5인실 환자 모두가 서로를 쳐다볼 지경이었다. 민망해서 고개만 푹 숙이고 환부 소독을 이어갔는데, 갑자기 옆에서 손 하나가 쑥 들어왔다.

 

“선생님, 밥도 못 드셨구나? 이거 하나 먹고 해요.”

 

박카스 한 병과 초코파이 한 개. 순간 당장이라도 장갑을 벗고 우걱우걱 먹고 싶었지만, 환자들로부터 어떤 것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이 번쩍 떠올랐다.

 

“환자분, 이러시면 안 돼요. 저희 이런 거 받으면 혼나고 저 의사 못해요.” 나름대로 정색을 하고 거절했다.

 

그러자 환자가 갑자기 박카스 뚜껑을 따고 초코파이 봉투를 찍 찢었다. 그러더니 병실 밖 스테이션까지 들릴 만큼 쩌렁쩌렁 외치기 시작했다.

 

“아이고, 내가 먹으려고 했는데 나 오늘 금식이었지. 아까워서 어떡하나 버려야겠네.”

 

그 말과 동시에 나에게 귓속말로 “들었죠? 이거 버리려는데 선생님이 주워간 거니까 이건 환자에게 받은 거 아니잖아. 그러니까 이거 얼른 가서 먹고 와요”라며 가운 주머니에 살포시 넣어주었다.

 

박카스와 초코파이. 아직도 이 두 개를 볼 때마다 꼬마 의사에게 뭐 하나라도 먹이려고 하셨던 그 환자의 센스가 떠올라 웃음이 난다. 그렇게 해서라도 전하고 싶었던 환자의 마음을 어떤 직업에서 느껴볼 수 있을까.

 

이제는 의사도 의료직이 아니라 서비스직 아니냐는 우스갯소리가 자주 들린다. 일선에서 의사들의 힘을 빠지게 하는 뉴스를 들을 때면 내가 뭘 위해 이렇게 하고 있나 하는 회의가 들 때도 있다. 그래도 의사라는 직업을 절대 포기하고 싶지 않은 이유는 소위 환자들의 ‘정성’을 마주하는 순간들 때문이다. 온갖 힘을 다하려는 참되고 성실한 마음. 그러면서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큰 마음들이 나를 지속하게 만든다.

 

정신건강의학과는 수술을 하거나 당장 숨이 넘어가는 상황을 해결해 주는 과는 아니다. 하지만 한 사람의 삶 전반을 파악하고 다룬다는 점에서 참으로 어려우면서도 매력 있는 진료과다. 치료 효과가 다른 과보다 극적으로 나타나기는 힘들어도, 치료 효과가 제대로만 나타난다면 한 사람의 인생을 변화시킬 수도 있다.

 

외래에서 2~3개월에 한 번씩 만나는 환자인데 댁이 멀어 거주지 근처로 병원을 안내해 드리겠다고 조심스럽게 말씀드린 적이 있다. 그러자 환자가 갑자기 울먹이기 시작했다. 본인은 나와의 진료시간 10분을 기다리며 3개월을 살고, 또 다음 3개월을 살게 되는데, 왜 자꾸 다른 데로 보내려 하냐며 서운해 했다. 내 딴에는 환자가 형편도 어렵고 거리도 먼 와중에 내가 환자를 위해 내드릴 수 있는 시간은 고작 10분 남짓이라 그게 죄송해서 거주지 근처로 회송을 안내해 드리려고 했던 거였다. 환자는 나의 배려가 꽤 섭섭하게 들렸던 모양이다. 그래서 몇 번이나 괜찮으시냐고 물은 후 계속 본원에서의 외래 진료를 지속하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 날 30도가 웃도는 날씨에 그 환자가 외래로 찾아왔다. 작은 키에 캐리어 가방을 끌고 땀을 뻘뻘 흘리며 진료실에 들어오기에 얼른 놓고 자리에 앉으시라고 했다. 저걸 끌고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또 걸어오느라 얼마나 힘드셨을까. 진료실에 앉아서 이야기만 하는 나도 등줄기에 땀이 나는 날인데 그 모습을 보니 마음이 너무도 안쓰러웠다. 그날도 진료를 마치고 건강히 지내시라는 말과 함께 종료하려는데, 환자가 갑자기 캐리어를 열더니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기 시작했다. 이 순간은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들에게는 매우 긴장이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가끔 진료실에서 예측하지 못하는 불의의 사고가 일어나기도 해서 항상 주의하고 조심하기 때문이다.

 

순간 진료실에 풍기는 익숙하고도 구수한 냄새. 비닐에 겹겹이 싸인 무언가가 진료실 책상에 놓이기 시작했다.

 

“내가 보니까 의사선생님들은 반찬을 못 해 먹는 거 같더라고요. 근데 내가 우리 동네에서 솜씨가 좋다고 그래요. 이거 가지고가서 꼭 드세요. 통은 주실 필요 없어요. 내가 냄새날까 봐 여러 번 싸서 왔는데…”

 

당황스럽기도 하고 순간 뇌가 멈추어 버린 듯 아무런 반응을 하지 못했다. 나름 산전수전 다 겪은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인데 이런 상황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냄새날까 봐 걱정을 하면서도 꼭 국수를 삶아서 같이 먹으라는 환자. 그러고는 다음 환자 기다릴까 봐 쏜살같이 진료실을 떠났다. 모든 진료를 마친 뒤 몇 개의 비닐봉지를 풀고 나서야 안에 담겨있던 열무김치를 볼 수 있었다. 심심하고 시원한 열무김치. 그리고 그 안에 든 구수한 냄새와 따뜻한 마음에 늘 중립적이어야 한다고 했던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의 눈에도 눈물이 맺혀버렸다.

 

한동안 일에 지쳐 매너리즘에 빠져있던 요즘, 다시 뜨거운 마음이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평소 나는 한식을 좋아하지 않아서 주변에서 국적을 잘못 태어난 거 아니냐고 핀잔을 들을 때가 많다. 하지만 이 날은 퇴근길에 집에다 전화를 넣었다.

 

“엄마, 흰 쌀밥 좀 해 주세요, 맛있는 김치가 있어서 밥 좀 실컷 먹어야겠어요!”

 

정신건강의학과
조을아 전문의

정신건강의학과 조을아 전문의는 대학교 때 심리학을 전공하며 사람에 대해 파고들었고, 그 길로 의과대학을 거쳐 지금의 정신건강의학과 의사가 되었습니다. 2022년 서울아산병원에 입사해 수면장애와 정신질환 환자들을 진료하고 있습니다. 병원에서 마주하는 환자들과 그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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